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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포슬포슬한 '남작', 단단 쫄깃 '대서'…감자도 족보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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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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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식탁에 오르는 식재료가 어떻게 변화해 왔고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20년 현장 전문가의 시선으로 점검합니다.


한국의 명품 식재료 ⑪ 감자

| 전분 많아 부드럽고 달콤한 ‘분질 감자’
감자탕·카레·닭볶음탕용으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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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감자의 계절이다. 물론 감자도 여느 채소 작물처럼 1년 내내 생산되긴 한다. 한겨울 제주 조천에서는 노지 감자가, 조금 위쪽의 해남·완도 등에서는 하우스 감자가 난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사이 무안·김제·함안 등 위쪽으로 생산지가 이동한다. 7월 후반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지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강원도에서 난다. 그러다 기온이 떨어지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서 감자가 생산된다. 하지만 6월을 감자의 계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맛있는 감자가 나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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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생산되는 감자 품종은 대략 30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웬만한 사람들도 아는 품종이 있다. TV 광고를 즐겨 보거나 감자칩을 좋아한다면 ‘수미’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수미는 1960년대 미국에서 육종한 품종으로 국내에는 78년 도입됐다. 현재 수미는 국내 감자 생산량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대표 품종이다. 감자를 먹었다면 10개 중 8개는 수미 품종으로 먹었다는 얘기다. 생산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말이다. 수미 다음으로 많이 심는 품종이 ‘대서’라는 가공용(감자튀김용) 품종이다. 제주에서는 ‘대지마’라는 품종이 우세하다. 보라밸리 등 색깔이 있는 감자와 두백·남작 등도 조금씩 생산된다.

| 형태 안 변하고 맛 깔끔한 ‘점질 감자’
프렌치프라이 등 가공제품에 많이 사용

감자는 크게 점질(粘質) 감자와 분질(粉質) 감자로 나뉜다(생식용 색이 있는 감자는 논외로 한다). 둘의 차이는 전분 함량에서 나온다. 전분이 많으면 분질, 적으면 점질 감자다.

점질 감자는 조리하거나 삶았을 때 외형 유지가 잘돼 음식 모양새가 좋다. 대표적인 품종이 ‘대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공용에 적합하도록 육종된 품종이다. 감자에는 과당·포도당·자당이 존재하는데 점질 감자는 당 성분도 분질에 비해 적다. 당분이 적으면 감자를 튀겼을 때 발생하는 메일라이드(당과 단백질의 결합으로 인해 향·색이 변하는 현상) 반응이 적게 일어난다. 메일라이드 반응이 활발하면 진한 갈색으로 변색이 되고 심한 경우 쓴맛까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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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감자칩이나 프렌치프라이를 하는 용도로 대부분 대서 감자를 사용한다. 당이 적기 때문에 색 변화가 적고 깔끔한 가공품이 나와 가공업자들이 선호한다. 다만 당분과 전분이 적기 때문에 찌거나 볶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점질 감자는 조리하면 음식 식감이 부드럽지 않다.

분질 감자의 대표 품종은 남작·두백·하령 등이다. 이 중 남작은 30년대에 들어온 품종으로 품종명이 확인되는 최초의 감자다. 나머지 두백과 하령은 국내 육성 품종이다. 분질 감자의 특성은 감자를 쪘을 때 제대로 알 수 있다. 감자를 찌면 감자의 표면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진다. 이는 분질 감자의 특성으로 감자의 조직을 구성하는 펙틴질이 찌는 과정에서 손실돼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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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감자 조림을 하면 형태가 칼질한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뭉개지지만 부드러움과 자체의 단맛이 좋다. 닭볶음탕·감자탕·카레를 할 때 특히 최고의 맛을 낸다. 대신 쉽게 뭉개지기 때문에 감자를 넣는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보통의 방법처럼 끓일 때 같이 넣으면 안 되고 요리 중간에 넣으면 맛있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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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질 감자를 넣고 감자탕을 끓이면 등뼈 살을 발라 먹는 것보다 살살 녹는 감자를 국물과 함께 비벼 먹는 맛이 더 좋다. 숟가락으로 감자를 밥 위에 올리기만 해도 쉽게 부서질 정도로 부드럽다. 그 때문에 밥과도 잘 섞인다. 해마다 이맘때면 분질 감자를 주문해 딸에게 간식으로 쪄주곤 했다. 처음에는 보통의 아이가 그렇듯 설탕 단맛으로만 먹었다. 소금으로 먹는 방법을 깨친 후엔 설탕을 멀리하고 소금만으로 분질 감자의 단맛을 오롯이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먹는 것에 있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분질 감자가 맛있다는 뜻이다.

| 두 가지 특징 모두 가진 ‘수미 감자’
재배 쉬워 국내 생산량 80%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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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감자의 80%를 차지하는 수미는 어떨까. 중국집의 짬짜면, 냉온 겸용 에어컨과 같은 게 바로 수미다. 점질과 분질 중간 정도의 전분과 당을 함유한다. 가공용으로도 요리용으로도 적당하다. 조리가 되었을 때는 분질의 형태를 지니다 이내 점질의 성질을 나타낸다. 이런 다용도적 특성이 수미 품종의 재배 면적 확대에 일조했다. 생산자의 말을 빌리면 그나마 손이 덜 가는 농사라는 것도 한몫했다 한다. 수미감자가 맛없는 감자는 아니다. 하지만 한 품종의 일방적인 득세는 맛의 다양성을 방해한다. 즉 지역에 따라 생기는 미세한 맛 차이만 있을 뿐 다양한 맛의 경험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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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트에 갔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네 마트에서는 감자를 팔 때 지역이 표시되고, 중량 구분에 따라 파는 게 일반적이다. 1년 내내 햇감자가 나오는 까닭에 ‘햇감자’ 표시가 지역만 달리할 뿐 중량과 원산지 옆에 항상 붙어 있다. 일본은 우리와 달랐다. 산지·중량 표시는 같지만 우리한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품종이다. 홋카이도산 ‘남작’이라는 표시가 있고 다른 감자엔 다른 지역과 품종이 표시돼 있었다. 그러니 개인 취향과 조리 목적에 따라 구입할 수 있다.

언젠가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감자조림을 먹고 반한 적이 있다. 설탕의 단맛과는 다른 단맛이 가득했다. 주인에게 감자 품종을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이 “모른다”였다. 시장에서 구입한, 혹은 부식을 대주는 사람이 주고 간 감자가 운 좋게 맛있었을 뿐이다. 감자 생산자는 품종을 알아도 중간유통업자나 구매자는 모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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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성서’라고 불리는 미쉐린(미슐랭)가이드 서울편이 나온다는 소식에 고급 식당들이 술렁이고 있다. 어느 식당은 집기를 바꿨다, 인테리어를 바꿨다, 나아가 메뉴 구성을 다시 했다는 말이 들린다. 미쉐린가이드가 나오는 과정에서 미식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테리어와 메뉴의 디스플레이, 구성, 조리법만 바뀌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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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식재료 연구가 ‘여행자의 식탁’ 대표

식재료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같이 병행돼야 한다. 현재 감자뿐만 아니라 유통되는 농축수산물이 대체적으로 품종을 무시하고 종의 이름만으로 유통된다. 경북 영덕에서 분질 감자를 키우는 김현상 생산자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왜 농사가 좀 더 편한 수미 대신 두백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맛있어서”였다. 같은 종이라도 품종에 따라 맛은 많이 다르다. 품종을 찾는 습관이 미식의 시작이다. 

음식상식 햇감자 아니면 조금씩 구매해야 싹 안 나

감자는 수확 후 몇 달 되면 싹을 틔울 수 있다. 이 때문에 햇감자는 박스 단위로 구매해도 되지만 생산된 지 3개월이 지난 감자들은 조금씩 구매하는 게 좋다. SF영화 ‘마션’에서 주인공이 화성에서 감자를 수확하자마자 다시 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영화적 상상으로 풀어낸 것이다. 실제로는 대부분 3개월 정도 지나야 가능하다.

김진영 식재료 연구가 ‘여행자의 식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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