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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돕는 재미로 돈번다|사환서 사장까지 오른 우일방적대표 염길섭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은 지난날 가난했던 어린시절과 그런 고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고향을 등지고 고향어린이들을 외면할수 있겠읍니까.』
코흘리개 어린시절 가난이 싫어 고향을 뛰쳐나온 12살 소년이 이제 중년의 사장이 되어 재산과 정성을 고향에 쏟고있다.
우일방적대표 염길섭씨(56·광주시 충장로5가 96의6).
「나혼자 잘살면 그만」이란 각박한 사회에서 그는 「애향심」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꼭 돈많은 사람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광주시변두리 양산동에 여종업원 40여명을 거느린 자그만 면사·혼방생산업체가 그의 공장. 그나마 최근엔 섬유업계의 불황으로 적자까지 감수해야 하는 사양기업이지만 고향에 쏟는 그의 정열은 뜨겁기만 하다.
염씨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복내면 용동리산골. 『부모님께서는 딴 마음 먹지말고 머슴살이나 하라」고 하셨읍니다. 73년 고향을 찾았을때 초롱초롱한 어린 눈동자들을 대하면서 저는 머슴살이나 준비해야 했던 제 어린시절을 생각했습니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몰래 서울행 완행 열차를 타던 제모습을 본 것이죠』
염씨는 그때부터 가난을 원망하며 배움에 목말랐던 자신의 지난날을 되새기면서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살아온 지난날을 용서받기로 결심했다.
우선 5백만원을 들여 복내서국교의 갈라지고 찌그러진 책걸상을 모두 새것으로 말끔히 바꿔줬다.
『새 책상과 새 걸상에 앉으니 공부가 더 잘되는 것같다』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무엇인가 더 해주고 싶었다.
염씨는 77년 고향마을 국교앞의 옥답 1천5백평(싯가 1천5백여만원)을 사들여 자신의 호를 딴 우석장학회를 설립, 매년 여기서 생산되는 쌀 40여가마(2백50여만원)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광주시내에서 겨우 의류직물 판매점을 할때였다.
그로부터 8년간 장학금 지급혜택을 받은 학생은 중·고교생만도 1백80여명. 지급액은 2천여만원에 이른다.
그는 그래도 허전했다. 80년과 81년엔 복내서국교와 이웃 복내국교에 아담한 공원을 조성,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의 동상을 각각 세워 어린이들의 정서 교육장으로 제공했다.
위인전과 동화책 등 어린이용 도서는 수시로 보내주는 기본 선물이고, 최근엔 VTR 등 현대식 시청각 교재까지 마련해줬다.
염사장의 이같은 정성어린 뒷바라지가 계속되자 복내면민들도 감동, 그의 고향마을어귀에 공덕비를 세웠고 복내서국교 박우극교장(59)은 1백50여 어린이들에게 기회있을적마다 『자신도 어려우면서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말자』고 강조하고 있다.
『처음 무작정 상경했을 때는 숱한 고생을 했읍니다. 문전걸식·인쇄소사환·시골장꾼 등 허리띠를 졸라가며 30여년동안 객지를 떠돌면서 이를 악물었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큰 설움은 못배운 것이었읍니다』 고향어린이들에게는 그같은 설움을 결코 안겨주지 않겠다고 염씨는 다짐한다.
『지금의 공장을 세운 것도 겨우 지난해였읍니다. 비록 사양기업이지만 성실히 일하는 공장가족과 열심히 공부하고있는 고향어린이들을 생각하면 힘이 절로 솟습니다』 넉넉하지도 못하면서 가난한 고향을 돕는 그의 열정은 이기주의와 배금사상에 찌든 병든 사회에 한가닥 맑은 샘물처럼 그침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광주=박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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