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부녀가 분단 아픔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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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벌였던 한국전쟁이 멈춘 지 반세기가 지났다. 이제는 사랑이 싹틀 때도 됐을까.

18일 방송하는 정전(停戰) 50주년 특집극 '신 견우직녀'(MBC 밤 9시55분)는 남남북녀(南男北女)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온 북측 응원단이 소재로,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무용수 연정(최강희 분)과 특종을 캐기 위해 접근하는 프리랜서 스포츠 기자 태영(류수영 분)이 주인공이다.

공동으로 극본을 쓴 작가 홍진아(36).홍자람(33)씨는 자매다. 이들의 아버지는 소설가 홍성원(66)씨. 그는 1970년대 대하장편'남과 북'에서 양측의 군인.민간인.기자 등 다양한 인물의 시점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절절히 그려냈었다.

경기도 고촌에 있는 洪씨의 집에서 4.19세대인 아버지 洪씨와 386세대인 큰딸 진아씨를 만났다. '24시간 재택근무'였던 아버지와 딸은 주제를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인데 어느 순간 세대차이가 불거졌다.

"나이가 이쯤 되니 웬만하면 놀라지 않는데도 얘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를 곁에서 듣고는 깜짝 놀랐어요. 전쟁의 공포를 모르는 요즘 20~30대들이 한국전쟁과 임진왜란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한다고들 해서요. 이산가족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서해교전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더군요."

洪씨가 "요즘 젊은이들은 통시적 시각과 역사의식이 없다"고 지적하자 곧장 반론이 나왔다. '신세대 보고-어른들은 몰라요''학교''나' 등의 프로그램에서 청소년들의 생활과 생각을 그들 눈높이로 그려온 딸이다.

"그렇지 않아요. 저보다 어린 또래들이지만 그들의 힘은 따로 있어요. 인터넷에 들어가면 논쟁이 얼마나 치열한데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죠. 어법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진아씨는 "주인공들이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기에 화해나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면서 "남북의 신세대를 제대로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세대라고 해도 남과 북은 인종이나 피부색보다 훨씬 넘어서기 어려웠다. "자료화면에서 북한 탁구선수가 남자 친구에게 아주 세련된 농담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도 임수경씨 방북 때 길거리에 드러누웠던 세대인데, 그런 북한 사람의 모습에 놀라는 제 자신이 더 놀라웠죠."

결국 진아씨는 북한 사람들이 초면에 늘어놓게 마련인 체제 찬양 발언 따위를 극 중에서 상대편 남측 기자가 농담으로 먼저 소화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런 딸들의 고민에 아버지도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90년대 중반 TV드라마로도 방송됐던 '먼동' 같은 역사소설을 쓸 때 1백년 전 일도 생생하게 그려내던 상상력이 이북사람의 일상에 대해서는 딱 막혀버려요. 여느 이북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치약을 쓸지, 집안 어디쯤 '장군님 사진'이 걸려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요. 소름끼치는 일이죠."

아버지는 딸들의 작업에 여간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이번에는 자매끼리 예전의 공동작업에서 겪지 못한 혹독한 갈등을 겪었다. "전체적인 설정대로 밀고 나가면 될 것 같았는데, 동생은 대목마다 의문을 제기하는 거예요. 북한 여성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는 지문 하나를 놓고도 두 시간을 다퉜으니까요."

싸우다 밤을 지새는 일도 많았다. 때마침 이들의 집을 찾은 洪씨가 "여기는 이 부분이, 저기는 저 부분이 좋다"며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저희는 기분이 좋아져 아침에 식당에 갔는데, 아버지가 음식을 시켜놓고 다른 생각에 골똘하신 거예요. 아까의 대사를 어떻게 하면 더 좋게 고칠 수 있을까 궁리하셨던 거죠."

진아씨는 아버지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시각적인 문체라 드라마로 옮기고픈 생각이 곧잘 든다"고 말했다. "아버지처럼 선이 굵은 작품을 써보고 싶은데 역량이 부족하다"고도 했다.

洪씨는 조선시대의 전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신작을 구상 중이다. 2000년에 '남과 북'을 전면 개작해 북측 인물을 한층 풍성하게 그려냈던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번 새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상상력을 가로막는 오랜 분단 현실을 뛰어넘고픈 바람은 아버지와 딸이 한마음이었다.

이후남 기자<hoonam@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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