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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늘 외톨이던 12세 동수, 낙서 시켰더니 성격이 밝아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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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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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가명)군이 홍은진 미술심리상담사로부터 사고력과 연상력을 높이기 위한 미술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불안정 애착과 관계부적응 등의 증상 때문에 지난 2월 미술치료상담원에 왔다. 5개월간 20여 차례의 미술치료를 받은 뒤 정서적 안정을 되찾고 자존감을 회복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우리 같이 스케치북에 낙서해볼까. 자, 크레파스 들고 마음껏 칠하면 그동안 담아왔던 스트레스가 전부 없어질 거야.”

아이들 마음의 병 고치는 ‘미술상담소’
데칼코마니·콜라주 등 다양하게 활용
상담 끝난 아이들 친구들과 잘 어울려

책상 위에 도화지와 크레파스·물감 등 각종 미술도구가 놓여 있는 25㎡(8평) 규모의 심리치료실. 미술심리상담사인 홍은진(47)씨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동수(12·가명)군의 손을 잡고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동수군은 빨강·파랑·노랑 순으로 크레파스를 들고 흰 도화지를 채워나갔다. 아무런 의미 없이 지그재그로 선을 긋는 그야말로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미술심리치료를 맡은 홍씨는 동수군의 그림을 계속 칭찬했다. 색을 칠하던 중 도화지가 놓인 책상에까지 크레파스가 묻자 “동수 오늘 정말 그림 그리고 싶었구나”라고 격려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식이었다. 평소라면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날 법한 행동까지도 의미를 부여하고 칭찬했다. 동수군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동수군이 그림을 완성한 뒤에는 ‘숨은 그림 찾기’가 시작됐다. 비뚤배뚤한 선으로 가득 찬 그림을 보고 연상되는 물건을 찾아내는 시간이었다. “영어 알파벳 C가 보여요. 애벌레도 보이고요. 물고기랑 저기 콜라 병도 있어요.” 동수군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서 연상해낸 것들을 차례로 새로운 도화지에 그렸다. 동수군은 “그림을 그릴 땐 너무 집중하느라 조금 힘들었지만 색칠까지 끝내고 보니 정말 재밌고 스트레스도 풀렸다”며 활짝 웃었다.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인한 불안정 애착, 사회성 결여로 인한 관계부적응, 그리고 ‘나는 그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낮은 자존감까지. 지난 2월 동수군이 평택대 미술치료상담원에 처음 왔을 때 보인 증상들이다. 특히 동수군은 자신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항상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심리상담은 일주일에 두 번씩 이뤄졌다. 상담원에서 동수군을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그림’이었다. 일반적인 형태의 정신상담이나 학습치료를 진행할 경우 병원치료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2월 이후 20여 회의 미술심리치료가 진행됐고 동수군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자존감이 높아진 덕분에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는 데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외모도 관리하기 시작했다. 동수군은 지난 5개월간의 다이어트로 몸무게를 25㎏ 줄였다.

평택대 미술치료상담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동수군처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다. 정신·심리적 문제로 인한 증상인 데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학생들을 상대하는 만큼 치료는 100% 맞춤형으로 이뤄진다. 주의산만,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행동장애를 앓는 학생들에겐 정서적 안정을 위한 심리 치료를 최우선으로 하고,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분노·불안 증세를 보이는 학생들에겐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부모·자녀 합동 체험치료를 진행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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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기자가 미술상담 체험을 위해 잡지 사진을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 [사진 신인섭 기자]

미술치료상담원에서 이뤄지는 치료의 핵심은 미술 매체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크레파스를 사용하는 낙서 치료부터 점토, 데칼코마니, 콜라주(종이나 사진 등을 오려 붙이는 미술기법)까지 연령과 증상에 따라 다양한 치료법이 적용된다. 특히 직접 그림을 그리는 데 무리가 있는 영유아나 집중력 부족 증세가 있는 아이들에겐 주로 점토나 콜라주를 활용한 미술 치료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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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원을 찾은 아이들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 [사진 신인섭 기자]

박민석(5·가명)군은 부드러운 점토를 활용한 미술 치료로 분리·불안 증세가 치료된 대표적인 사례다. 민석군은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할 정도로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겁냈다고 한다. 실제 처음 미술치료상담원을 찾았을 때 상담을 위해 엄마와 떨어뜨려 놓자 끊임없이 눈을 깜빡이는 등 틱장애 증상까지 보였다. 하지만 점토 치료가 시작된 뒤 눈에 띄게 정서적으로 안정됐고 집중력도 회복했다. 부드러운 점토를 활용해 강아지·공룡 등을 만들면서 자신의 행동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고 부모와 떨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도 떨쳐낸 덕분이다.

이 미술치료상담원은 다문화가정과 빈곤층 자녀들에 대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달 초 사단법인 위스타트와 협정을 맺고 상담원 내에 인성교육센터를 만들었다. 심리적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고 체험학습·캠프 등을 통한 집단 치유도 시도할 계획이다. 다문화가정과 빈곤층 자녀에 대한 치료는 이르면 이달 중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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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원을 찾은 아이들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 [사진 신인섭 기자]

이근매 평택대 미술치료상담원장은 “평택에는 미군과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의 자녀 중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정서·심리적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지만 마땅히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체험한 미술치료 … 음식 사진 골랐더니 "휴식이 필요합니다"

기자가 직접 콜라주를 활용한 심리검사에 응해봤다. ‘콜라주 상담’으로 관심사·고민·욕구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검사는 시사·여성·남성·경제지 등 10여 권의 잡지 중 오려 붙일 사진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근매 미술치료상담원장은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선택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고만 답했다. 10여 분간 고른 사진은 밝은 조명의 생활소품 가게, 휴양지, 음식, 자동차, 웃고 있는 모녀의 모습 등 7장이었다.

이 원장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쳐 있어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또 “단란한 가족생활에 대한 갈망도 엿보인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음식 사진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고, 밝은 조명의 가게와 휴양지 사진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반영한다.

이 원장은 “현대인 대부분은 타인과의 관계나 직장생활 등으로 심리적으로 억압돼 있고 이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콜라주 상담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서와 감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글=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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