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불편한 인문학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기사 이미지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온 나라에 인문학이라는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각종 문화센터에, 방송에, 도서관에, 심지어 카페에서도 인문학 강좌들이 줄을 잇는다. 인문학 강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이 ‘힐링’을 기대한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가 아픈 것이며 인문학은 과연 그들에게 묘약인가.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게 있다. 인문학을 무슨 정신의 외상을 치료하는 만능 ‘아카징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빨간약’을 바르면 금세 영혼의 새살이 오르고 세련된 교양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인문학은 짧은 시간에 정신의 외양을 바꾸어 놓는 장식품이 아니다. 인문학은 손쉬운 정답 기계가 아니라 불편한 ‘질문’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근저에서 의심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인문학은 ‘공리(公理·axiom)’를 의심하므로 그것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삐딱하게 보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대충 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삐딱하게 파고들 때는 보인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된다. 무비판적으로 믿어왔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목표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神)을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여기에서 “국가의 여러 신”이란 그리스 신전의 신들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당시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던 공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입만 열면 질문을 던졌으며, 그의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났다. 그는 “너 자신”까지도 의심할 것을 요구했다.

확실하지 못한 모든 것은 질문과 회의의 대상이 돼야 한다. 질문을 억압하는 사회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회이며, 수많은 질문을 다 견뎌낸 명제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이다. 이렇듯 인문학은 값싼 치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 부재의 안온한 삶을 뒤흔드는 것이다. 질문을 거부하는 사회에 인문학은 최대의 적이며 불편한 대상이다. 인문학은 시스템의 뿌리까지 파고들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기 때문이다.

2007년 하버드대학에서 나온 보고서에 의하면 하버드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들의 아래와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드러내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혼란시키며, 스스로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버드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목표는 놀랍게도 소크라테스의 죄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과연 이 불편한 질문들의 확산인가. 모든 인문학 강좌에 이런 혐의를 둘 수는 없다. 다만 일회성 치유의 값싼 위로들 앞에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교육부의 프라임 사업(PRIME·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사업)으로 당장 2017학년부터 인문·사회계열의 정원이 2500여 명 줄어들고 이공계열 정원은 4400여 명 늘어난다.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인문학계열 학과의 정원 축소 혹은 폐과가 속출하고 있다. 총 6000억원의 지원금 앞에서 대학과 인문학의 이념은 산산이 찢기고 있다. 소위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코어사업)’의 이름으로 인문학은 융·복합의 실험학문으로 거듭나기(?) 위해 제 살을 갉아먹고 있다. 여기에도 총 600억원이라는 자본의 당근이 있다. 질문을 죽이고 그 자리를 ‘성과’와 ‘생산성’으로 바꿔치기 하는 정책들이 ‘인문역량 강화사업’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질문은 ‘성찰’과 ‘반성’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이 일에 매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질문이 없고 닫힌 추론과 공리만 있는 사회는 사상누각이다. 적어도 공동체의 일부는 계속 반성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문학의 목줄을 조이지 마라.

오 민 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