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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키다리 아줌마의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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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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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미스터(Mr.) 신예리,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일곱 살이고요. 장차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에요….’ 10년 전 꼬마 소녀 시마오가 내게 보낸 첫 편지다. 구호단체가 후원 아동으로 맺어준 지 몇 달 만에야 드디어 소식을 전해 온 거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답장을 썼다. ‘안녕, 시마오. 앞으로 네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잘하는지 시시콜콜 내게 알려 주렴. 근데 참, 난 여자란다. 미스터가 아니라 미즈(Ms.)로 불러 줄래?’

여성의 절반 이상이 문맹인 나라 모잠비크, 거기다 인터넷도 전화도 없는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로선 ‘키다리 아저씨’는 몰라도 ‘키다리 아줌마’는 상상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매달 월급 통장에서 꼬박꼬박 이체되는 3만원. 얼마 안 되는 그 돈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꿈을 이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바람이 났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2년 전 시마오의 마지막 편지로 산산조각 나 버렸다. “미즈 신예리,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어요. 사정이 좀 생겨서요….” 청천벽력 같은 통보에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학을 잘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그래서 장차 좋은 선생님이 될 게 분명한 꿈나무가 아쉽게도 꿈을 지레 접어버린 거다.

얼마 후 국제 구호 전문가 한비야씨를 만난 김에 그때 내가 느낀 크나큰 실망감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마 초경이 시작됐기 때문일 거예요. 아프리카에선 생리대를 구하기 어려워 학교를 많이들 그만둬요.”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시마오가 끝내 말 못한 속사정이 그런 일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명색이 남자도 아닌 여자라면서, 8년이나 인연을 이어 온 아이한테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조차 못돼 준 게 한없이 부끄러웠다. 알고 보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만 수백만 명의 소녀가 생리 때문에 학교를 자주 빠지거나 아예 다니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곳 아이들에게 이른 결혼과 임신, 그로 인한 가난이 두고두고 대물림되는 이유였다.

생리대 고민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님을 알게 된 건 최근이다. 충격적인 ‘깔창 생리대’ 사연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후 지자체와 정부, 국회까지 앞다퉈 저소득층 소녀들을 위한 생리대 지원에 나선 걸 보면 다들 같은 심정인 모양이다. 평소 이들이 청년수당이니 무상보육이니 다른 복지 이슈를 놓고 밑도 끝도 없이 싸우는 걸 생각하면 퍽이나 이례적인 일이다. 아프리카도 아닌 한국 땅에서 적어도 생리대 정도의 복지는 꼭 필요하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나 보다.

생리대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불평등은 요즘 지구촌 최대의 화두다. 국가 간 불평등이 전염병과 난민, 테러를 일으키고 국가 내 불평등은 갈등과 범죄를 양산하는 게 우리가 처한 불편한 진실이다.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해외 원조나 자선이 더 이상 고결한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다(『나와 세계』). “부유한 국가와 부유한 집단이 지금까지 살던 대로 편히 살고 싶어 행하는 이기적 행위”라는 거다. 중요한 건 이기심을 발휘하는 방법이다.

말라리아 해법만 해도 그렇다. 해마다 아프리카 어린이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데도 백신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스타들이 나섰다. 2005년 다보스포럼에서 여배우 샤론 스톤, 가수 보노 등이 앞장서 살충 처리된 모기장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원조 분야의 핫 아이템으로 떠오른 모기장을 너나없이 공짜로 나눠주자 엉뚱하게도 고기 잡는 그물로, 신부 결혼식 베일로 암시장에 나오더라나. 이후 한 구호단체가 고심 끝에 푼돈을 받고 팔았더니 오히려 제 돈 주고 산 모기장은 모기 막는 본래 용도로 쓰더란다. 원조도, 복지도 선의(善意) 못지 않게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단 얘기다.

무지 탓에 시마오를 떠나보낸 뒤 내가 새롭게 후원의 연을 맺은 아이는 인도네시아 소녀 에바리스티. 올해 여덟 살이다. 몇 년 후 이 아이에겐 절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적은 돈 달랑 보내준 걸로 내 몫의 이기적 노력을 다했다는 착각에 빠지진 않을 게다. 생리대와 테러는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에.

신 예 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