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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추격경제의 덫, 문·이과 구분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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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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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한번 발 디디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결심을 망설이게 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향하여 날아오르느니 차라리 지금의 고통들을 견디며 살게 만들지. 조심성으로 머뭇거리다 우리는 모두 겁쟁이가 되어 버려. 결단의 선명한 색채는 생각의 창백한 색조에 가려 병색을 띠고, 장중하고도 크게 들려오던 계획들은 엉망이 되어 행동의 명분을 잃어버리지.”

신세대는 개방적으로 자라나 도전을 두려워 안 해
문·이과 칸막이가 이들을 질식시키고 있지 않은가

비극적 가족사에 번민하며 햄릿이 남긴 유명한 독백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자조적 표현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두려움을 흥분과 기대감으로 반전시키는 이들도 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것인지,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자신이 미친 것인지를 묻는 모험심과 호기심 넘치는 돈키호테는 그런 쪽이다.

세계는 제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맞서 신중함과 모험심이 모두 필요하지만 무게 추는 시대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오늘의 세계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 드라마·디자인과 같은 문화산업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 영역으로 떠오르며 창조경제가 새로운 화두가 되면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지식과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자산이 됐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 경향을 가속화한다. 정보를 저장하고 정보에 기반해 문제를 푸는 일은 이제 인공지능이 맡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고가 우리의 몫이 된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전통적 가치관마저 흔든다. 이미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에서 보듯이 사람의 인식 능력은 단말기로 이양되고, 이 단말기들이 다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물리적 공간 너머 타인·사물과 연결되고 있다. 초연결주의가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구조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면서 전통적 규범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과학인력을 배출하는 것은 방향감 없는 기관사에게 폭주기관차를 맡기는 것과 같다.

창의적 사고와 공공의식은 기성관념과 삶에 대한 성찰에서 자라나는데, 추격경제에 최적화된 우리의 교육문화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 먹거리를 보장하는 특정 분야의 전문인을 양성해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결과 대학은 전공들을 세분화해 높은 칸막이를 둘러쳤다. 시간을 다퉈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수입하려다 보니 교육은 주입식이 됐고, 이미 있는 것을 수용하고 습득하는 것이 목표인 환경에서 실패는 명분을 잃고 악으로 간주된다.

칸막이, 주입식 교육, 실패에 대한 불관용은 도전과 성찰의 적으로 선진사회의 인재상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추격경제에의 몰입으로 이들은 우리의 뼛속 깊이 자리 잡았고, 추격경제가 가져다준 성공 신화의 단맛은 변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기존의 사고방식에 도전하고 인간과 사회를 성찰하는 것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하는 일이다. 과학기술 분야가 창의성과 공공성의 토양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인문사회과학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한편 과학의 시대에 과학기술에 대한 소양 없이 인간과 사회를 논하는 인문학·사회과학은 공론에 빠지기 쉽다. 결국 융합과 협력인데, 변화는 교육에 있어 칸막이를 거두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조만간 시행하기로 돼 있는 고등학교 문·이과 통합교육에 발맞춰 대학도 문·이과 구분의 틀을 벗고 학생들을 한 솥에 모아 가르쳐야 한다. 모든 신입생이 교양학부를 거치게 하든가, 이참에 인문·사회·자연대학을 통합하든가 하여 융합교육을 모든 학생이 심도 있게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칸막이 너머 이웃의 다양한 사고가 거침없이 유입될 때 유연하면서도 모험적인 사고가 싹을 틔우고, 모험적·창의적 사고가 지식의 방향등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실패에 대한 관용의 문화도 자리 잡을 것이다.

신세대는 발랄하고 개방적인 문화 속에서 자라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도가 이들의 잠재력을 북돋지 못하고, 오히려 질식시키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더 이상 이런저런 이해집단의 명분 없는 주장에 휘둘리며 지체할 이유가 없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