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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국가기밀이 새고 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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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9년 10.26사태 때 서울은 세계의 정보 전쟁터였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장(김재규)이 대통령(박정희)을 쏘아 죽인 대사건. 명색이 국가 보위의 최고 기관이던 정보부는 하루 아침에 '역적집단'이 됐다.

계엄이 선포되고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됐다. 합수본부장이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즉각 정보부를 장악했다. 80년 4월 全사령관이 정보부장을 겸임하자 "보안사가 정보부를 접수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복잡하게 사태가 진행되는 내내 서울은 최대의 정보어장(漁場)이었다. 각국 정보기관들의 촉각이 총집결됐다. 사건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어찌 전개될 건지, 자국에는 어떻게 작용할 건지를 캐고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세계대전급 스파이전(戰)이 벌어졌었다"고 당시 외교가의 한 사람은 전한다.'80년 서울의 봄'의 무대 뒤편은 그렇게 소리없이 분주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도 서울은 첩보 전장(戰場)이 됐다.

장막 속에 숨어있다 갑자기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 때문이다.각국 스파이들이 비밀리에 서울에 증파됐다. 최강의 대북 정보력을 자랑해온 미국 CIA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정일과 김정일맨들을 직접 만난 우리에게서 손톱만큼의 정보라도 얻어내려는 치열한 공작들이 벌어졌다.

국제적 사건이 터지는 곳엔 이렇듯 늘 보이지 않는 첩보전이 요란하게 마련이다. 특히 이해 당사국들은 거기에 목을 건다. 정보는 곧 국력이고, 정보의 우위는 외교 주도권과도 직결되는 요소라서다.

축적한 정보를 지키는 일에도 에누리가 없다. 그래서 '정보의 세계에는 우방(友邦)이 없다'고들 한다.

한데 요즘 우리쪽에서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귀한 정보들이 마구 새나온다. 그것도 주로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다.

"북한의 해킹능력이 미 CIA 수준"(4월) "국정원장 곧 CIA 방문"(6월) "북한 최근 5년간 70차례 핵 고폭실험"(7월) 등. 국민이 알아야할 사안이라고 판단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과 상대편이 엄연히 존재하는 바깥 세상에 그런 기밀들을 공개할 때는 충분한 고민도 했어야 했다.

얼마 전엔 국정원 간부들의 출신 지역별 분석이 한 신문에 공개됐다. 자료 출처는 역시 국회의원으로 추정됐다. 국정원의 항목별 예산 집행내역도 까발려졌다.

그 와중에 국정원 간부들이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청와대 직원에 의해 배포된 해프닝도 있었다. 그 사진을 구하려고 중국과 러시아 등의 정보원들이 군침을 흘리며 뛰었다는 후문이다.

비밀스러워야할 우리 정보기관의 알몸이 세상에 반쯤 노출된 기분이다.

우리처럼 정보기관이 의회의 통제 감독을 받는 나라는 미국.영국.독일.호주 정도다. 그리고 정보위 의원들에겐 '비밀유지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

한데 우리 의원들에겐 혹 국가 기밀들이 '정치적 한탕'의 소재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새 정부의 화두(話頭)중 하나로 '국정원 개혁'이 오르면서 생겨난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개혁과 기밀을 지키는 일은 엄연히 구별돼야 한다.

구멍가게도 보안해야할 정보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북핵(北核)사태로 중대하고 민감한 시기에 선뜻선뜻 입을 여는 의원들의 태도는 생각해 볼 일이다.

"외인에게 우리 처녀의 치마를 들춰보인 듯 수치스럽다"는 어느 국정원 사람의 말이 와닿는다.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