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아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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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직기는 백제학자였다.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4년)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아직기」로, 역시 일본 사서인 『고서기』에는 「아직길사」로 적혀 있다.
그는 왕의 분부로 말 두 필을 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에게 선사한후,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 했다. 물론 마부는 아니고, 학자 신분에 걸맞는 사육 책임자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아직기가 경서에 능통한 것을 알고 일황은 태자(원도치낭자) 의 스승으로 삼았다.
훗날 왕인박사가 일본에 초정된 것도 바로 아직기의 추천이었다. 일본은 백제 14대 근구수왕(재위 375∼384년)때 친선사절을 백제에 보내면서 특히 왕인박사를 지명해 초청했다. 그 무렵 일본은 백제학자들을 널리 스카우트하고 있을 때다.
근구수왕은 손자 진손왕 함께『논어』10권, 『천자문』1권을 들려 왕인박사를 일왕에 보냈다.
이것은 일본 사서에 적혀 있는데,『천자문』의 경우는 잘못된 기술이다. 『천자문』이 발간된 것은 그로부터 3백년후인 중국 양나라 무제때의 일이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예부터 우리가 전해준 문화를 그렇게 과장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겼다.
왕인의 해박한 경서 지식은 일본응신왕의 신임을 받아 그 또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아직기나 왕인박사가 일본 황실의 스승이 된 것은 일본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 유학의 대가인 임나산이나 전중주세같은 학자가 남긴 글을보면 백제의 영향이 일본에 얼마나 깊고 넓게 스며 들었는지 알수 있다.
왕인이 전한 문자와 유교사상은 도덕면에서 장유유서, 정치면에서 인정치민, 경제면에서 기록장부, 외교래면서는 서신래왕등 질서를 이루어 놓았다고 했다.
요즘도 일본말로 『고급품이 아니다』는 표현을 『구다라나이』라고 한다. 「구다라」를 한자로 표기하면「백제」다. 『백제가 아니다』는 말과 『고급이 아니다』는 말과 뜻이 똑같다.
그 당시 일본에선 백제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고급으로 쳤던모양이다. 오늘의 시속과는 천양의 차이다.
때마침 일본 아스까(명일향) 촌사적지에서 요즘 아직기 후손의 본간이 발견되어 일본 사학자들이 흥분하고있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뿌리를 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한일 고대사 연구는 일본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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