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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감은 마약처럼 강한데 … 10년 버틸 자신 있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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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25면

김동욱 대표(오른쪽)가 오승환 기념공을 던지는 시늉을 하자 이예랑 대표가 김현수 배트를 휘두르는 동작으로 응수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야구팬들은 요즘 아침이 기다려진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강정호(피츠버그)·박병호(미네소타)·이대호(시애틀)가 경쟁하듯 홈런을 터뜨리고, 김현수(볼티모어)·추신수(텍사스)는 또박또박 안타를 쳐 낸다. ‘돌부처’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은 등판했다 하면 삼진 쇼를 펼친다.


‘한국산 메이저리거’들의 뒤에는 이들을 빅 리그에 진출시키고, 정성껏 뒷바라지하는 에이전트들이 있다. 이들을 동경하고 에이전트가 되겠다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에이전트 산업 활성화에 관심이 많다.


국내 야구 에이전트 ‘빅 2’인 김동욱(41) 스포츠인텔리전스그룹 대표와 이예랑(37) 리코스포츠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오승환을 일본(한신)에 이어 미국으로 보냈고, 임창용을 국내 팀에 연착륙시켰다. 일본에서 뛰는 투수 이대은(지바롯데)과 야수 하재훈(야쿠르트)도 ‘김동욱 사단’ 멤버다. 김 대표는 스포츠 브랜드 푸마와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B스포츠에서 일을 배운 정통파다.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이예랑 대표는 영어방송 아나운서, 라디오 DJ를 한 이색 경력자다. 김현수의 볼티모어 입단을 성사시켰고, 박병호의 국내 에이전시도 맡고 있다. 친한 선수들의 일을 도와주다가 본격적으로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 김현수 입단식 때 넥타이 색깔을 팀의 상징인 오렌지색으로 맞춰줄 정도로 섬세하다.


인터뷰는 서울 청담동에 있는 리코스포츠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둘은 “화려해 보일수록 어둡고 힘든 일이 많다. 에이전트가 되려면 단단히 각오하고,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에이전트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김=“선수와 구단·스폰서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답답하다. 선수에게 급히 필요한 용품이 있는데 용품업체에서 제 날짜를 못 맞출 때는 속이 탄다.”


▶이=“선수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마음이 너무 힘들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카톡을 보낼 때도 ‘화이팅!’ ‘힘들지?’ 같은 걸 쓰면 더 마음 쓰일까 봐 고민을 한다.”


▶김=“나도 선수 카톡을 보면 기분이 보인다. 오승환이 잘한 날은 문자를 보내고 통화도 하지만 블론 세이브(이기는 상황에서 나와 승리를 날려버리는 것) 한 날은 가만 놔둬야 한다. 반면 하재훈은 ‘오늘 제 타격 폼 어땠어요? 오른쪽 어깨가 빨리 떨어지는 것 같죠’라고 조목조목 물어보는 스타일이다.”


-어떤 선수와 함께 하고 싶은가.▶이=“몸과 마음이 건강한 선수. 상식적인 것 같지만 부상 경력 같은 건 알아내기 힘들다. 더 중요한 건 나랑 성격이 맞아야 한다는 거다. 에이전트는 부모보다 가깝다. 카드를 어디서 얼마나 썼는지까지 알아야 한다.”


▶김=“나도 인성을 먼저 본다. 선수와 에이전트는 계약 관계라기보다는 신뢰 관계다. 문제가 생긴 선수 때문에 다른 선수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기다려주는 선수가 있고, ‘걔 때문에 바쁜 건 아는데 좀 너무한 거 아냐’ 하는 친구도 있다. 계약하는 자리에서 10분 정도 대화해 보고 ‘아니다’ 싶어서 자리를 뜬 적도 있다.”


▶이=“김현수·박병호 선수를 보면 존경스러울 때가 많다.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자기관리 철저하고, 똑똑하다. 방출 위기까지 몰린 김현수 선수가 이겨내는 걸 보고 느낀 게 많았다. 이런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의 성취감은 마약과 같다.”


-에이전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이=“정직이다. 선수와 에이전트는 애인 같은 관계다. 한번 싫어지면 모든 게 다 싫어진다. 서로에게 믿음이 있어야 한다.”


▶김=“나도 투명하게 모든 걸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난 어디서 돈이 들어오면 통장 사진 찍어서 보내준다. 그게 제일 편하다.”


이 대표는 술을 잘 못한다. 남자 선수들과 개인적인 자리를 갖는 것도 부담스럽다. 대신 모든 것을 똑 부러지게 설명하고 꼼꼼하게 챙겨준다. “예상 시나리오를 최대한 많이 준비하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든다. 에이전트는 가장 나쁜 상황부터 베스트까지 다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김 대표는 “오승환 선수는 집에서 소맥 먹는 걸 좋아한다. 블론 세이브 한 날은 꼭 소맥을 해야 하고, 그 자리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 전지훈련 기간에는 술을 권하지도 먹지도 않지만 시즌 중 힘들 때 한잔씩 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을 미국·일본과 비교하면.▶김=“미국·일본은 시장 규모가 크고 역사도 길지만 에이전트 역량은 우리가 더 낫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자료를 만들어 가면 미국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한국 에이전트들이 큰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난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선수가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잘 돼 있다. 한국은 에이전트가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다. 우리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들어와 전문지식을 쌓아야 한다.”


-문체부에서도 에이전트 산업을 활성화 하려고 하는데.▶김=“야구 에이전트라며 다니는 사람이 50명 정도 된다. 문제는 양질의 에이전트를 어떻게 육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느냐다. 스포츠 산업과 미디어를 이해하고, 법률 소양과 언어 능력도 갖춰야 한다. 야구·축구·농구 등을 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에이전트 활성화를 일자리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방향이 잘못됐다. 선수 권익 보호가 먼저다. 일자리 만들겠다며 문턱을 너무 낮추면 선수가 피해를 본다. 에이전트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거 봐, 이럴 줄 알았어’라는 반응이 바로 나올 거다.”


에이전트 일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물었다. 이 대표는 “아∼”하고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에이전트 하고 싶다는 친구들 메일이 하도 많이 와서 얼마 전에 20명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미안하지만 여러분이 에이전트로 먹고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선수 한 명 데리고 있으려면 10년 걸린다’고 말해줬다. 패션이나 연예산업처럼 화려해 보이는 직종일수록 수요-공급 불일치가 심각하다. 그럼에도 도전해 보겠다면 누가 말리겠나.”


김 대표가 말을 받았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 전체 몸값이 1년에 800억원 수준이다. 에이전트 수수료를 5%로 본다면 40억원 시장이다. 이걸 50명이 나눠먹는다? 답이 안 나온다. 다만 국내 스타들을 해외로 진출시킬 수 있다면 해볼 만하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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