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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아는 대표작이 전부는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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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32면

역자: 이지수 출판사: 다산초당 가격: 1만6000원

예술가에게 대표작은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다. 언제 어딜 가도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끈덕지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나는 그 대표작을 알기에 그 그림을 그린 사람도, 혹은 그 곡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유명세에서 오는 착시 효과는 이처럼 작지 않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는 이 같은 실수를 범하기 쉬운 사람이다. 우리는 분명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토실토실한 비너스를 알고 있으니 여러 작품 중 그의 그림을 골라내기란 식은 죽 먹기라 여길 것이다. 금발에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고, 자유분방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신들을 모르고 지나칠 리 없을 거라 장담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루벤스의 모든 작품에 그 같은 특징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외교관으로서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화풍을 받아들였다.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군주 부부의 궁정화가를 시작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로부터 뤽상부르 궁전 장식을 위해 20여 점의 작품을 의뢰받은 덕분에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아예 자신의 방을 갖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죽기 5년 전인 1635년쯤 그린 것으로 알려진 ‘댐이 있는 풍경’은 평소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토록 즐겨 그리던 사람도 없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무지개도 없다. 오로지 하늘과 나무, 강만이 그대로 화폭에 내려앉아 한 치의 꾸밈도 없는 수묵화 같은 정취를 풍긴다.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놀림 받던 루벤스의 흔적은 좀체 찾아볼 수 없다.


유럽 미술에 조예가 깊은 저자는 이처럼 화가의 대표작이 아닌 마지막 그림에 초점을 맞춘다. 화가가 일평생 그려온 것은 무엇인지, 마지막 순간에는 무엇을 그렸는지, 왜 그것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근대 이전의 화가는 궁정 혹은 고객의 주문에 얽매인 몸으로 결코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자유롭게 그릴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작품만큼은 본인의 의지가 투영된 작품을 그려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그간 봐왔던 작품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물감에 사람의 생피를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강렬한 빨강색이 인상적인 ‘성모승천’으로 유명한 티치아노의 마지막 작품 ‘피에타’는 90% 이상이 은회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그가 사용해 온 화려한 색감을 스스로 봉인하고 전혀 다른 금욕적이면서도 절제된 느낌으로 구성한 것이다.


반면 마지막 순간까지 영광의 순간을 놓지 못하고 권력욕에 젖어 오히려 예전만 못한 그림으로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고대 예술에서 나온다 믿었던 다비드는 이상화된 무표정과 조각상처럼 정지된 자세를 통해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등 위대함의 신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영웅이 사라진 시대에 그린 ‘비너스와 삼미신에게 무장해제되는 마르스’는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자기복제에 불과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지금 당대를 호령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이 남긴 마지막 작품엔 어떤 모습이 담기게 될까. 일평생 자유롭게 그리고 만들어온 작가들도 종국에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더불어 그간 내가 ‘잘 안다’고 믿어왔던 모든 이들의 작품을 다시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미술사에 찍힌 좌표 정도로만 기억됐던 이름들이 한 명씩 하나의 인간으로 와닿는 것도 큰 강점이다. 한 작품씩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a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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