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2)-런던 올림픽을 시발로(1)런던 올림픽을 시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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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48년 8월11일, 영국 런던의 엠파이어 메인 스타디움. 국기게양대에 자랑스런 태극기가 올라갔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아래 시상대에 올라선 나는 너무 벅찬 감격으로 내내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조국이구나. 이것이 바로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의 기쁨이로구나!』
나는 동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섰다는 기쁨보다 올림픽 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게 함으로써 신생 조국 젊은이의 기상을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는 자부심으로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첫 출전한 제14회 런던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사에 신기원이었고. 올림픽 역사에서도 감회가 새로운 대회였다.
10회 로스앤젤레스대회와 11회 베를린대회엔 이 땅의 건아들이 몇 명씩 참가했고, 특히 베를린에서는 마라톤의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기도 했으나 모두 일장기에 가린 비극의 기록이었다.
당초 12회 대회(1940년)는 일본 동경에서, 13회 대회(1944년)는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결정됐으나 1939년 9월1일 폴란드에 독일군이 진격함으로써 발발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런던 올림픽은 꺼졌던 성화가 12년만에 다시 피어 올라 인류의 제전이 부활되는 감격적인 무대였다.
조직위원회 총재는 국왕 「조지」6세. 주경기장인 엠파이어 스타디움은 1904년 제4회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고 선수촌은 병영과 학교 건물을 이용, 개최 비용을 아꼈다.
한국 선수단 67명의 일원으로 선발된 나는 역도 미들급(75kg급)에 출전했다. 당시 한국 선수단은 서윤복등 3명이 출전한 마라톤에 큰 기대를 걸었고, 다른 종목은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내 나이 29세. 지금으로 치면 선수로는 환갑을 넘었다고 해야겠지만 그때는 패기와 자부심이 넙치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경기를 앞둔 나에게 변고가 생겼다. 현지에 도착해 연습하던 중 허리를 삐끗해 연습은 커녕 허리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된 것이다. 그렇다고 선수단에 알릴 수도 없어 남몰래 고민하다 가까스로 회복됐다.
우리 선수단은 초반부터 부진을 거듭, 마라톤 등 대부분의 종목이 탈락하는 바람에 노 메달인채로 종반에 경기를 벌이는 나와 한수안(복싱)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다.
역도 미들급 경기는 8월10일 엠프레스 홀에서 밤늦도록 벌어졌다.
추상이 주특기였던 나는 1백22·5kg을 들어올려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고 인상에서 1백12·5kg을 기록, 3위에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마지막 시기에서 나도 모르게 『어라차차』 고함을 지르며 1백45kg을 번쩍 들어 올렸다. 결국 총계 3백80kg으로 베를린올림픽 챔피언이었던 「토니」(이집트)와 동점을 기록, 체중을 비교하여 1·92kg이 적은 내가 동메달리스트로 결정됐다. 1, 2위는 미국의 「스펠먼」과 「조지」.
역도 시상식은 다른 종목과 달리 경기 다음날 메인 스타디움에서 거행돼 우리 임원과 선수들이 모두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메인 스타디움에 처음 태극기를 올리게 됐으니 이 또한 올림픽과의 특별한 인연이다.

<필자 약력>
▲1919년 서울출생(66세) ▲37년 휘문고보졸 ▲43년 보성전문 상과졸 ▲48년 런던 올림픽, 52년 헬싱키 올림픽 역도 미들급동메달 ▲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 금메달 ▲68∼76년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72년 뮌헨 올림픽 및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선수단 단장 ▲76년 태릉선수촌장 ▲85년5월∼현재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훈련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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