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탈출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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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4면

일러스트 강일구

“어제 신호등 건너편에서 아이가 제게 손을 흔들며 부르는 것 같았어요. 너무 생생해서 무서울 정도였어요.”


몇 년전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상담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순간순간 떠오르는 사건과 관련한 장면, 자식과 보냈던 추억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 번 떠오를 때마다 아픔은 다시 재생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몸은 소름으로 떨고 경직돼 탈진될 정도로 지치기도 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과거의 어떤 기억이 섬광 같이 짧은 이미지로 떠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플래쉬백(flashback)이라고 한다. 플래쉬백은 영화적 기법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짧은 섬광 같은 이미지가 영화의 한 장면같이 나오기도 하고, 아주 디테일하게 그날의 일들을 복기한다. 이때에는 특히 색·냄새·소리 같은 것까지도 재생돼 마치 내가 그 안에 다시 던져진 것 같은 경험을 한다.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억의 이중구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억은 사건기억으로 뇌의 해마라는 구조에 저장된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 시간이 태깅되어있고,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언제 결혼을 했고, 시험을 봤고, 운전면허를 땄는지 알고 있다. 한 줄의 타임라인에서 줄을 서서 연속선을 이루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재조정되면서 기억으로 남는다. 시간에 따라 조금씩 그 일에 대한 기억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고, 시간의 역순으로 서서히 옅어져서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에 반해 정서가 연동된 기억은 해마가 아니라 편도에 저장된다. 이 경우에는 어떤 일부는 매우 상세하고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그때 맡은 화장품 냄새, 상처의 생김새, 들렸던 소리는 재현되는 반면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잘 짜맞춰서 기승전결의 이야기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정서 기억에는 언제 벌어진 일이라는 타임라인이 태깅되지 않는다. 태깅되지 않은 기억은 조각난채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다가 어떤 자극이 오면 갑자기 떠오른다.


사건 기억이 시간의 역순으로 옅어지는 것과 달리 시간이 지정돼있지 않은 조각난 트라우마와 관련한 기억은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이것이 트라우마 경험을 한 이들이 플래쉬백 현상으로 괴로워하는 이유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실시간으로, 지금 벌어진 일 같은 생생함으로, 냄새·촉각까지 더한 4D영화 같이 다가오니 말이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은 이 기억들에 시간을 태깅해서 원래 타임라인의 삶의 스토리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지금 떠오른 건 예전 일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것이다’라고 구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압도당할만큼 괴롭고 생생한 느낌이지만, 이것은 과거의 일이었고 지금 내가 집중해야하는 것은 오늘, 여기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이다. 다가올 미래에 대처하는 것으로 관점의 전환을 해낼 수 있을 때 트라우마로부터 서서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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