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단을 향한 눈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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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9면

둘째딸이 그린 늠름한 지단의 모습.

최근 나는 민생서원(民生書院) 건교 90주년 행사 때문에 무척 분주했다. 중·고등부를 다녔던 나는 모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후배들과 함께 부를 노래를 작곡하고 뮤직비디오와 메이킹 필름 촬영을 진행했다. 거기에 이를 홍보하기 위한 언론 인터뷰까지 빽빽하게 이어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중 한 TV 인터뷰에서 사회자는 내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1.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뭔가요. 2. 운동신경이 있는 편인가요. 3. 교정에서 가장 즐겨찾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이 질문들은 순식간에 나를 그 때 그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교복을 입고 교정을 거닐던 나의 소녀시대로.


순서대로 답을 하자면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음악이라는 것은 예상가능한 답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신경은? 내가 생각하기엔 ‘분명히’ 있다. 실은 농구를 꽤 좋아했다. 단지 그 당시에는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무척 드물었기 때문에 매년 영국왕립음악원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부상의 가능성을 최소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12살 때부터 농구를 하지 않았다. 만약 그 때 그만두지 않고 계속 했더라면 키카 175cm까지 컸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수퍼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가장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은 음악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맞은 편에 있던 대운동장이다. 나는 특히 돌계단에 앉아 동급생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결단코 어떤 잘생긴 남학생을 남몰래 흠모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축구 경기 관람 자체를 좋아했을 뿐. 아마 아빠와 오빠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홍콩은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TV에서 영국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첼시·리버풀·아스날…. 모두 내가 좋아하는 팀들이었다.


이듬해 본격적으로 피아노 레슨에 나서면서 나의 생활방식에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피아노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지 재능에만 의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4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는다면 기껏 시간과 노력을 들여 힘들게 번 학비를 낭비하는 꼴이 될 터였다. 그때부터 주말에 축구 경기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일은 없어졌다. 월드컵 결승전 등 중요한 경기만 챙겨보는 정도였다. 아무리 바빠도 4년에 한 번, 그것도 90분 경기를 볼 시간이 없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운동신경이 없는 것이 아니다. 조용하고도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을 뿐.


2006년 7월 9일 새벽 3시. 또다시 월드컵 결승전의 날이 밝아왔다. 그 해 월드컵은 독일에서 열렸기 때문에 시차가 꽤 컸지만 나는 홍콩 집에서 두 딸과 함께 군것질거리와 음료수를 잔뜩 준비해놓고 TV 앞에 앉았다. 우리는 TV와 거리가 60cm도 채 되지 않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혈투를 지켜봤다. 경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미 연장전까지 110분이나 진행된 상태였다- 프랑스 주장이자 미드필드였던 지네딘 지단이 갑자기 이탈리아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결국 지단은 퇴장당했고 프랑스는 승부차기에서 3대 5로 패했다.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목전에서 놓친 셈이다.


사실 이 경기는 은퇴를 앞둔 지단의 고별전이었다. 만약 이겼더라면 그는 우승팀 주장으로서 전 세계의 축하를 한몸에 받는 동시에 자신의 선수 인생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맛봤을 것이다. 당시 나는 다툼이 벌어진 이유를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매우 가슴이 아팠다.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축구팬들 중 한 명으로서 눈 앞에 벌어진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나는 눈물범벅이 됐다. 일면일식도 없는 남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니, 나 스스로도 왜 이렇게 감정이 격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를 대신해 고통을 나누고자 한 걸까. 이 날 일은 오래도록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다.


그 후 오랫동안 축구계의 동향을 알지 못했다. 이제 월드컵 결승전은 친구들과 함께 모일 좋은 구실에 불과했고,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별 관심도 없는 듯 했다. 한데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지단의 소식을 들었다. 오 나의 영웅이여, 이 얼마나 오래간만인가! 비록 그 당시 당신의 극단적 처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포기한 당신의 선택에 감탄을 표한다. 그리고 당신이 감독으로 이끌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달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건 마치 그 때 내가 흘린 눈물은 충분히 가치로웠다고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을 위해 다시 한 번 갈채를 보낸다.


천추샤(陳秋霞·진추하)라이언팍슨?파운데이션 주석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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