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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금융 중독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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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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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논설위원

민간기업에서 20여 년간 재무전문가로 일해 온 A씨는 몇 년 전 채권단 관리를 받는 중소 조선사 대표로 임명됐다. 몸집을 줄이고 수익을 내는 게 그의 임무였다. 불가피하게 인력을 감축하고, 적자만 내는 덤핑 수주도 자제했다.

하지만 채권단이자 사실상 대주주인 국책은행이 발목을 잡았다. 어느 날 또 다른 국책은행이 관리하는 조선사가 수주한 선박을 하청 생산하라는 ‘지시’성 요청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저가 수주한 배를 더 낮은 값에 만들어 납품하라는 얘기였다. 수백억원의 손실이 눈에 빤히 보였기에 A씨는 거절했고, 몇 달 뒤 연임 통보를 받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는 “결국 국민 돈인 정책금융이 너무나 방만하게 운영되고, 구조조정을 촉진하기는커녕 방해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씨가 황당한 요구를 받던 시기, 국책은행들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대상인 정책금융 개편에 맞서 밥그릇을 지키는 게 주된 관심사였다. 인수위 때부터 정책금융 개편을 논의하던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초 “중복되고 비효율적인 정책금융을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사분오열된 정책금융을 대외(수출)·국내·중소기업으로 교통정리해 조직과 기능을 개편하자는 거였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은 물론 중소기업은행과 보증기관들까지 위기감을 느꼈다. 국회와 소관 부처에 반대 논리를 펼치는 전방위 작전이 펼쳐졌다. 결국 정책금융 개편은 이명박 정부 때 쪼갠 산은과 정책금융공사를 재통합하는 미봉으로 끝났다. “이때라도 제대로 손봤으면 지금처럼 기업 부실이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정책당국자의 뒤늦은 후회다.

조선·해양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 8일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고 수출입은행에 1조원을 출자하는 등 모두 12조원을 구조조정에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사고 친 이들은 따로 있는데 국민이 봉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대우조선 경영진은 수조원의 부실을 감추고 ‘조선 3사 중 유일한 흑자 회사’라고 자랑했다. 대주주이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부실을 알아챌 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채 퇴직자들을 낙하산으로 내리꽂는 데에만 열중했다. 정부는 서별관회의라는 초법적 형태로 기업의 생사와 자금 지원을 결정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정권과 정부의 책임이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모두 정책금융 덕이다.

정책금융의 과거를 폄훼할 필요는 없다. 경제개발이 절실했던 시기 정책금융이 큰 역할을 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은 될성부른 산업을 키우고 도로와 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외자를 도입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벤처를 육성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정책금융의 당위성과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민간은행이 외자를 빌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고금리로 기업 활동이 제약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조선·해운 구조조정에서 보듯 정책금융은 오히려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정책금융의 실패를 또다시 정책금융으로 돌려 막기 때문이다.

약이 과하면 독이 된다. 정책금융도 마찬가지다. 2014년 말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책금융 비중은 7.33%에 이른다. 독일(0.99%), 캐나다(0.83%), 미국(0.45%), 영국(0.03%)보다 월등히 높다. 정책금융이 중소기업이나 약자가 아닌 대기업을 지원하는 기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산은과 수은의 지난해 말 대기업 대출 비중은 각각 66.8%, 58.6%로 2007년 말(61.3%, 36.5%)보다 큰 폭으로 늘었다. 부실 대기업을 정책금융이 떠받치고 중소기업과 국민이 그 비용을 감당하는 구조다.

정상적이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대기업 의존을 줄이고 스타트업과 신성장 산업을 키워야 할 시대적 과제와 정반대 방향이다. 멀쩡한 기업까지 위기에 빠뜨리는 좀비기업을 연명시키고 민간 금융이 성장할 여지를 빼앗는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런데도 예산과 달리, 국회와 국민이 통제하고 감시할 장치도 허술하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이젠 정책금융 중독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나 현 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