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경의 Shall We drink] <20> 달콤한 리스본의 맛, 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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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마 너머로 테주 강이 넘실대는 리스본 풍경.

‘진자(Ginja)를 마시지 않고는 리스본을 떠날 수 없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어느 호스텔 벽에 여행자가 남겨놓은 메모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진자가 뭐 길래? 그리곤 맹렬히 다짐했다. 리스본을 떠나기 전에 진짜 진자를 마셔 보리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28번 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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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은 언덕 7개로 이뤄진 도시다. 테주(Tagus) 강과 맞닿은 코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에서 호시우 광장(Praca do Rossio)까지 평지를 제외하면 발길 닿는 곳마다 언덕이요, 눈길 닿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언덕에서 언덕을 잇는 길 위로 노란 트램이 땡땡 소리를 내며 오간다. 그 중 가장 오래된 28번 트램은 가파른 고개를 넘고 닿을락 말락 좁은 골목을 지나 여행자를 주요 명소로 데려다 준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 리스본 골목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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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켜켜이 쌓인 골목 안 파스텔 빛 건물 사이에는 언제나 햇살이 춤춘다. 바람의 리듬에 맞춰 색색의 빨래가 나부끼고, 어디선가 포르투갈의 민요 파두(Fado) 가락이 흘러나온다. 저녁이면 골목마다 사르디나(Sardina)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굵은 소금을 솔솔 뿌려 석쇠에 구워 먹는 사르디나는 우리말로 정어리다. 1인분을 시키면 정어리 5~6마리에 흰 쌀밥, 감자를 푸짐하게 차려준다. 여행객은 포크로 정어리 껍질과 씨름하거나, 껍질 채 먹으며 왜 이렇게 짜냐고 투덜대지만, 리스본 사람들은 손으로 껍질을 스르르 벗겨내고 살만 쏙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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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근사한 전망을 보여주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언덕투성이 리스본에서 얽히고설킨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사이 진자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진자를 다시 떠올린 건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언덕, 알파마(Alfama)의 미로 같은 길과 사르디나 먹는 법에 익숙해 졌을 때였다. 이를테면, 알파마의 리스본 대성당 왼쪽 길을 오르면 전망이 환상적인 ‘포르타스 두 솔(Portas Do Sol)’ 전망대가 나오는데, 왼쪽 길로 새면 오렌지나무가 총총히 늘어선 쿠르제스 다 세(Cruzesda Sé) 거리가 나온다는 것. 식사는 모퉁이의 노천카페 ‘크루제스 크레두(Cruzes Credo)’가, 책을 보며 커피를 홀짝이기엔 ‘포이스 카페(Pois Cafe)’가 제격이란 걸 알게 됐다.

그날따라 여러 번 지나쳤던 상 도밍고스(São Domingos) 성당 옆길에 눈길이 갔다. 내부가 검게 그을린 성당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1959년의 화재를 버텨낸 건물이다. 세월이 할퀴고 간 아픔을 후손들이 기억하도록 검게 타버린 내부를 그대로 뒀다. 그래서 누군가는 비운의 성당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기적의 성당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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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 가게 ‘아 진지냐’ 앞에서 진자를 마시는 사람들.

성당 주변에는 유독 진자 가게가 많다. 대부분 의자나 테이블이 따로 없는 작은 선술집이다. 그 중 간판에 빨간 체리 5알이 그려진 모퉁이 진자 가게, ‘아 진지냐(A Ginjinha)‘ 앞은 늘 문전성시다. 5대를 이어온 진자 가게라는 명성을 듣고 온 여행객이 반, 습관처럼 진자 한잔 탁 털어 넣으러 오는 단골이 반이다.

진자란 신 체리와 설탕을 아구아르덴트라는 리큐어에 담가 만든 체리주를 말한다. 맛이 진하고 달콤해 식후 소화 촉진주로도 인기다. 진자는 원래 집집마다 담가 먹던 담금술이었는데, 이 가게가 문을 연 후 주변에 진자 가게가 하나 둘 생겨났단다.

진자를 주문하니 딱 소주잔 크기의 플라스틱 잔에 따라줬다. 가게 앞에 서서 진자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진하고 달콤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순간, 아쉬움이 와락 밀려왔다. 내일이면 리스본을 떠나야 해서였다.

그때 옆에서 진자를 홀짝이던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넸다. 포르투갈어라 알아들을 순 없어도 내가 괜찮은지 묻는 투였다. 아, 진자는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마시는 술이 아닐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내가 아는 포르투갈어 중 한 마디를 했다. ‘따봉!’

한국엔 오렌지주스 이름으로 알려진 따봉은 포르투갈어로 ‘좋다’, ‘괜찮다’는 뜻이다. 내게 다시, ‘따봉(괜찮아?)’이라 되묻는 아저씨에게 잔을 들어올려 ‘무이또 봉!(아주 좋아요)’이라고 답했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포르투갈에서는 어딜 가나 웃으며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어 좋았다. 내 바람대로 진자 한 잔으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 행복했다. 작지만 소소한 행복의 맛이란 진자처럼 진한 달콤함이 아닐까 생각하며 한참을 서성였다. 황금빛 햇살이 어루만지는 리스본의 골목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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