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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큐닉스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경기도 부천의 변두리에 있는, 그것도 세들어 있는 「큐닉스」사의 생산공장은 첫눈에 초라하기까지 했다.
2백평짜리 작은 공장에 20여명의 기능공들이 옹기종기모여 컴퓨터 조립작업을 하는 모습은 지난해 52억5천만원매출실적에 순이익 4억원을 올린 회사의 규모와는 걸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처럼 초라한 공장을 찾아주셔서.』
찾아간 기자에게 건네는 이범천사장(35)의 첫인사였다.
그러나 큐닉스의 참모습은 이러한 겉모습보다는 다른데 있었다. 비좁은 공장안에는 자체 시스팀 응용연구소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새로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에러를 점검하고, 반도체칩이 가득 들어찬 컴퓨터 회로판을 테스트하는 젊은이들이 꽉차있어 보였다.
알고보니 1백30명의 직원중 연구요원이 50명, 이가운데 과학기술원 (KAIST)출신의 30대전후 젊은 석사가 15명이나 됐다.
공장이 작은것도 이유가 있었다. 노하우를 외부에 노출시키지않기 위해 자체생산은 몇몇제품에 국한하고 대부분은 하청공장에 맡겨 생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큐닉스가 처음 꿈틀거린것은 국내컴퓨터업계가 막 발돋움을 한 81년9월. 단돈 2천5백만원에 시작했다. 회사는 4년만에 자본금 5억원, l백30명의 직원을 거느린 기업으로 고속성장했다.
고급두뇌의 힘이 컸다. 컴퓨터 붐을 타고 컴퓨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렴 나타나 외국제품의 복사·하청생산에 열을 올릴때 다른 기업들이 개발하지 못한 신기술개발에 눈올 돌렸다.
회사가 망하면 시골에 가서 수학선생이라도 할 각오로 이사장은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안암동 20평짜리 골방에 큐닉스란 간판을 내걸었을때 재산이라고는 약간의 돈과 컴퓨터에 미친 20대젊은이 4명뿐이었다.
직원들과 함께 밤을 새우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었으나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출자금을 다 까먹은채 2억원의 빚까지 걸머졌을 때는 끝장이라 싶었다한다.
결국 회로도 설계도 등을 디자인해 팔겠다던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나 방향전환을 할수밖에 없었다.
이사장은『우리의 두뇌를 팔기 위해서는 뭔가를 만들어내 우리의 능력을 세상에 증명해 보여야 했다』고 지난 일을 돌이켜본다.
이래서 착수한게 「한글워드프로세」 였다.
우선 한글용 CRT (컴퓨터 단말기)프린터가 개발된게 없었으므로 이들 주변기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론에는 자신이 있었던 이들도 상품화에 필요한 「잔신경」을 쓰는데는 서툴수 밖에 없었다.
예정보다 3개월 늦은 82년11월에야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가 전자쇼에 출품돼 큰 반향을 불렀다.
이 워드프로세서는 시스팀저장용량 1천4백만자에다 3천자의 한자와 영문처리, 각종 자체와 크기선택기능등을 갖춘 고성능 문서처리기였다.
별 힘 안들이고도 대우·금성·두산등 컴퓨터 대메이커에 납품과 기술제공의 길이 트였다.
최근에는 모든 명령을 한글로 처리할수있는 새로운 소프트웨어와 그래픽 사운드 기능을 보강한 새컴퓨터(MSX2)를 선보였다.
현재 큐닉스의 주종은 한글프린터로 총매출의 25%를 차지한다. 이밖에 워드프로세서 CRT·소프트웨어가 각20%정도, 기술제공 로열티가 10%를 차지한다. 이중 다른기업에 판매하는 몫이 30%에 이른다.
이렇듯 동업종의 다른 기업들이 경쟁상대 아닌 고객이 된 것은 『다른 기업이 개발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한다』는 하이테크지향의 기업방침이 적중한 것이다.
큐닉스의 남다른 점은 연구개발에 과감한 투자에도 엿보인다. 지난해만도 매출액의 20%선인 10억원을 연구개발비로 쏟아넣였다. 이와함께 종신고용제를 도입, 회사를 믿고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벤처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성공못지않게 실패가 필수적(?)인데 잘못했다고 종업원을 쫓아낸다면 일이 될수없다는 것이다.
이사장은 최근에는 관리업무와 연구개발업무를 분리시켜 전문경영인을 초빙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엔지니어 집단으로 출발한 큐닉스가 아무래도 전문경영에는 미숙할 수밖에 없는 점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
국내 컴퓨터업계는 90년대 중반에는 약2조원의 시장을 바라보고있다. 기술개발을 게을리하다가는 시장을 빼앗기는것은 물론 선진국의 기술식민지가 되리라는 우려도 크다.
또 질보다는 가격에 좌우되는 국내시장구조, 소프트웨어의 부족, 첨단중소기업에대한 지원미비등과 함께 경기에 민감한 컴퓨터의 특성때문에 전망이 밝은것만은아니다.
지난83년 국내컴퓨터업계는 퍼스컴을 팔아 호황을 누렸었다. 그러나 외국기술을 뒤늦게 들여와 조립생산한 8비트 퍼스컴은 기능이 한정되고 소프트웨어가 부족한데다 과당경쟁까지 겹쳐 빈사상태에 빠졌다.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 큐닉스는 부가가치가 높은 두뇌의 산물인 디자인 소프트웨어개발에 또 희망을 걸고 전력투구하고 있다.
이사장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제기획원이 68년 처음 컴퓨터를 들여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때 이사장은 경기고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때 신비스런 컴퓨터의 능력에 관해서 훙미를 느낀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진학도 전자공학(서울대공대)을 택했다.
대학졸업과 거의 비슷한때에 과학기술원에 전산과가 생겨 이곳에 들어가 국내최초로 전산공학박사1호의 영예를 안고 컴퓨터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곽한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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