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포섭 못해 실패로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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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본사는 태국의 군사 쿠데타 취재를 위해 박병석 홍콩특파원을 9일 방콕에 급파했다. 박특파원은 이날 하오 현지에 도착 즉시 정부군과 쿠데타군이 총격전을 벌인 현장 등을 둘러보고 방콕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왔다.
쿠데타발생 11시간만인 9일 하오5시 방콕의 관문인 돈무앙 국제공항은 평온 그것이었다.
입국 수속을 위해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없는 긴 복도를 걸어 나오는 약 5분 동안 공항 직원 10여명이 TV앞에 둘러앉아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을 뿐, 이곳이 불과 반나절 전에 쿠데타가 일어났던 도시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택시로 달린 공항에서 한국대사관이 있는 방콕의 외교가 사탄로드에 이르는 30㎞의 거리에서도 탱크나 무장군인은 고사하고 군복 입은 사람 하나볼 수 없다.

<공항선 검문조차 안해>
이것이 바로「태국식 쿠데타」라고 실감케 된다.
하오11시-. 시간 당 2백50바트(약 9천원)를 요구하는 택시를 전세 내 찾아간 시가전이 벌어진 현장, 라담가( 관청 지역)에서도 긴장을 느낄 수 없다. 왕궁 주변에는 총을 둘러멘 수비 대원들이 초소마다 서있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택시 속에서 쿠데타의 긴장을 읽으려고 애쓰는 기자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기자는 오히려 팔짱을 끼고 조명이 휘황한 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비 대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가전을 취재 중이던 미국의 NBC-TV 기자가 사망한 현장에서도, 한때 혁명군이 접수했던 국회의사당에서도 카메라를 메고 밤늦게 서성거리는 외국 기자를 검문하기는커녕 무장한 경비병도, 바리케이드도 볼 수 없다. 불과 몇몇 방에만 불이 켜진 5층 규모의 육군 사령부 앞 화단에서 개 2마리가 장난을 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자정-. 방콕의 마사지 센터로 유명한 수품 비트가「클레오파트라」앞 주차장에는 50여대의 승용차가 꽉 들어차는 등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흥청거리고 있다.
또 태국 상권을 쥐고 있는 화교들의「야화라」상가 앞의「꾀떼오」라 불리는 포장마차에는 음식 튀기는 냄새, 왁자지껄한 소리가 유난하다.
그러나 10일 0시30분에 만난 외국인 상대의 맨해턴 호텔 2층 살롱 뉴로 타스 지배인 박춘규씨(53·교포)는 오늘따라 손님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울상이다.

<육군사령부 앞도 평온>
태국태생의 화교 장금주씨(33·무역업)는「태국에서 쿠데타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국왕이 잘 해결해줄 것이다. 장사하는데 며칠간은 지장이 있겠지만 곧 회복될 것』이라고 천연스레 말했다.
태국의 불발 쿠데타는 군부 내에 팽배한 군 인사에 대한 불만과 경제 정책에 대한 정부와 군부의 마찰로 예상되어온 것이다.
지난달 30일 단행된 태국 군경 인사에서 실력자들이 상당수 지방으로 좌천돼 태국국민은 그동안 군부의 동요를 우려해 왔다.
이와 함께 지난해 11월「프렘」수상이 국제수지와 재정적자 악화에 대처하기 위해 단행한 바트화의 평가절하는 그동안 군부내의 노골적인 비판대상이 되어 왔다.
군부는 17·3%나 되는 평가절하는 태국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하고 정부에 대해 환율조치 환원을 요구했었다.
쿠데타군은 이번 거사 전에 장성급 군부 실력자를 한명도 포섭하지 못해 기반을 굳히지 못한 채 와해됐다. 이들은 거사 당일인 9일「세름」전군 최고 사령관과 「크리앙사크」 전 수상 등을 자택에서 연행해 동조해줄 것을 강요했으나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전 수상마저 지지 안해>
이들은 나름대로「프렘」수상과「아르티트」군 최고사령관이 외유중인 때를 노렸지만「아르티트」장군의 심복인「티엔차이」군부총사령관이 인솔한 정부군이 전혀 동요치 않은 점이 이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아르티트」장군은 이미 자신의 정년을 1년 더 연장, 「프렘」수상의 임기가 끝나는 87년까지 군복을 벗지 않아도 되도록 해놓고 그 뒤 수상직을 이어받을 생각으로 공공연하게 정권욕을 드러내왔다. 그만큼 그는 현재 태국군부에 확고한 기반을 닦고 있는 것으로 평가돼 왔다.
쿠데타는 경제 악화·장기 독재 타파뿐 아니라 민주 회복·왕정 지지 등 그때마다 유사한 대의 명분을 내세우고 군부 통치를 계승해온 결과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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