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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19> 백년 묵은 찻집, 글래스고 윌로 티룸

중앙일보

입력

시대별 건축이 공존하는 글래스고의 중심가 조지 스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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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여행의 핵심 중 하나는 건축 여행이다. 시대별 건축이 공존하는 유럽의 도시라면 더욱 그렇다. 스코틀랜드의 항만도시 글래스고에 가면, 빅토리아 시대 저택과 아르누보 양식 건물이 뒤섞여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산업혁명에 발맞춰 번성했던 흔적이다. 건축에 깃든 시대정신에 귀를 기울이는 것. 글래스고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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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토시 및 스코틀랜드 예술가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캘빈글로우 미술관.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글래스고엔 매킨토시가 있다. 애플사의 매킨토시 컴퓨터가 아니라 건축가 겸 디자이너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1868~1928)를 말한다. 글래스고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아르누보(Art Nouveau), 즉 신예술의 선구자다. 18세기를 답습하는 건축 양식에 반기를 들고, 깎아내린 듯한 직선적인 공간과 식물을 모티브로 한 곡선 장식의 아르누보 양식을 개척했다. 그리고 글래스고 미술학교, 라이트 하우스, 윌로 티룸 등 많은 역작을 남겼다. 건물뿐 아니라 가구로 영역을 확대하며 유럽을 너머 미국에서도 주목받는 예술가가 됐다. 그 중에서도 고딕 양식을 재해석해 의자 등받이가 높은 하이백 체어(High Backed Chair)는 매킨토시의 시그니쳐 디자인으로 꼽힌다.

비가 흩뿌리는 아침, 매킨토시의 발자취를 따라 글래스고를 누비리란 마음으로 나섰다. 호텔 모퉁이를 돌자마자, 문 위에 ‘매킨토시 하우스’라고 글씨가 새겨진 건물이 눈에 띠었다. 과연 매킨토시의 건물로 둘러싸인 도시에 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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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키홀 거리의 윌로 티룸, 1층은 기념품 가게, 2~3층은 티룸으로 운영한다.

먼저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찻집 ‘윌로 티룸(Willow Tearoom)’의 가구를 소장하고 있는 캘빈글로우 미술관(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으로 향했다. 티룸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 같은 전시를 보니 어서 그 공간을 직접 보러 가고 싶어졌다. 미술관에선 매킨토시와 스코틀랜드 화가 뿐 아니라 렘브란트, 고흐,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다.

매킨토시가 남긴 역작 중 하나, 글래스고 미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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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매킨토시의 모교이자, 그의 대표작인 글래스고 미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를 찾았다. 매킨토시는 9m의 경사 진 땅을 절묘하게 활용한 기하학적 설계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공모전에 입상, 이 건물을 완성했다. 미술학도들이 자연광 속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방마다 창문 크기도 다르게 만들었다.

기하학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윌로 티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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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그의 디자인에 감탄하며 윌로 티룸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사실, 스산한 날씨 탓에 아침부터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했다. 또로록 빗소리가 차 따르는 소리였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이나. 윌로 티룸은 매킨토시가 처음 상업적인 인테리어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100년 전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간판의 서체, 등받이가 긴 의자, 자로 잰 듯 반듯한 직선의 천장 문양 등 옛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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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 티룸에서 마신 홍차, 랍상 소우총.

윌로 티룸 블렌드, 아쌈, 실론, 다즐링. 설레는 마음으로 메뉴판을 읽다 ‘랍상 소우총(Lapsang Souchong)’에 시선이 멈췄다. 랍상 소우총도 19세기에 등장한 차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이산(武夷山) 정산(正山) 지역에서 만들어진 중국 홍차 정산소종(正山小種)으로, 중국어 발음 쩡샨샤오쫑이 유럽으로 건너가 랍상 소우총이 됐다.

마치 몰팅 과정에서 피트로 건조시킨 싱글몰트 위스키처럼 진한 훈연향이 난다. 향긋한 홍차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만한 향이라 하겠다. 그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홍차이기도 하다.

랍상 소우총의 스모키한 향에는 비화가 숨어 있다. 1820년대에 청나라 군대가 정산 지역을 점거하며 차 농장을 차지해 버렸다. 군인들이 떠난 후 농민들은 제때 건조하지 못해 젖은 찻잎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소나무 뿌리를 태워 그 연기를 쐬게 했다. 찻잎 건조는 성공적이었다. 독특한 향까지 솔솔 피어올랐다. 우이산에 온 영국 상인들이 이 강렬한 향과 중후한 맛에 반해 유럽에 랍상 소우총을 소개했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최상급 홍차 반열에 올랐다. 지금도 랍상 소우총은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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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 티룸 4층에선 매킨토시가 만든 의자와 설계도를 볼 수 있다.

100년 전 윌로 티룸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기분으로 랍상 소우총을 주문했다. 일행들과 그 시절 이토록 모던한 공간은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매킨토시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얀 티 포트와 찻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찻잔에 랍상 소우총을 따르자 기대했던 그대로의 향이 번졌다. 강한 첫인상과 달리 한 모금 두 모금 마실수록 강한 향에 입안이 개운해 졌다. 문득, 이 공간에 깃든 매킨토시의 열정에도 향이 있다면 랍상 소우총처럼 뚜렷한 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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