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류성희 미술감독 “아가씨 속 춘화, 미술 맡은 여성팀원들이 직접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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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2016) 동서양 문물이 기이하게 충돌하면서도 조화롭게 녹아드는 저택. 코우즈키(조진웅)의 변태적 취향이 반영된 서재는 “이제까지 작업했던 영화 세트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는 게 류성희 감독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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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개봉 6일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넘어서며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아가씨’(박찬욱 감독). 일제강점기 일본 귀족 아가씨(김민희)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저택은 단순한 무대를 넘어서 이 영화의 또다른 주연이라 할만하다. 당시 조선과 일본, 서양 문화가 뒤섞인 시대의 풍경과 네 캐릭터의 개성을 녹여내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영화로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벌칸상(The Vulcan Award of the Technical Artist)을 수상한 류성희(48) 미술감독을 만났다. 벌칸상은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의 촬영, 의상, 미술 등 스태프들에게 주는 번외상. 칸영화제가 팀 아닌 미술감독 개인에게 이 상을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류감독은 ‘암살’, ‘국제시장’, ‘변호인’ 등 1000만 영화는 물론 박찬욱·봉준호 등 국내 유명 시네아스트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한국영화의 영상미학을 선도해온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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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2016)

늦었지만 수상소감은?
“평소 존경하는 촬영·미술감독님들이 받아왔기에 동경했던 상이다. 나 혼자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다. 촬영·의상·소품 등 ‘아가씨’의 비주얼을 책임진 스태프 전원에게 주는 상이다.”
미술 면에서 ‘아가씨’가 특별했던 점은.
“시기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시대를 재현하는 데 충실했던 ‘암살’과 달리 ‘아가씨’는 공간을 캐릭터로 만들고 사건의 이면을 함축해야 했기에 더 어려웠다. 하지만 굉장히 어려워서 오히려 더 도전이 됐고,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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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2015) 고증과 상상력을 더해 1930년대의 경성을 재현해냈다. 중국 처둔 세트장에 지은 미츠코시 백화점 세트는 국내 영화의 단일 세트로는 최대 규모. 류감독은 “세트에 압도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동서양의 건축이 결합된 저택이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다.
“이질적 요소의 충돌과 조화를 즐기는게 박감독 스타일이다.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재하는 건물을 찾아다녔다. 일본 미에현 구와나시에 위치한 저택에서 비슷한 건물을 찾아 외관을 찍고, 후반 CG(컴퓨터 그래픽)로 서양식 저택 구조를 덧입혔다. 개인적으로는 코우즈키(조진웅)의 서재에 가장 고심했다. 단지 멋질 뿐 아니라 코우즈키의 도착적인 욕망과 사대주의적 허영이 묻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헌팅하러 지난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서재 내부에 일본식 인공 정원을 들인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박감독이 평소 좋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서재는 정말 좋아했다. 서재에서 히데코(김민희)가 읽는 춘화는 미술팀이 동아시아·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춘화를 공부하며 손수 그린 것이다. 작업하면서 춘화를 1000장 가까이 본 것 같다. 미술팀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초기엔 꽤 민망해 했지만 나중엔 전문가가 됐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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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2003) 실제 경찰서를 섭외해 촬영하길 원했던 봉준호 감독의 뜻을 꺾고, 80년대 시골 풍경을 담은 경찰서 세트를 제작했다. “1980년대 세트부터 로케이션까지, 마치 실제 존재했던 세계처럼 보이고 싶었다”게 류감독의 말.

류감독은 미대(홍익대 도예과) 출신으로 미국 AFI(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영화미술을 배웠다. 영화계에 아는 이가 없어 포트폴리오를 들고 일일이 감독들을 찾아다녔다. 데뷔는 2001년 송일곤 감독의 ‘꽃섬’.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류승완 감독을 통해 ‘살인의 추억’(2003)을 준비하던 봉준호 감독을, 봉감독을 통해 ‘올드보이’(2003)를 준비 중인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명감독들과 함께 장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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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2003) 우진(유지태)의 펜트하우스 내부를 부유층 집처럼 고급 가구로 꾸미기에 예산이 부족하자 “아예 낯선 풍경을 보여주자”고 생각을 바꿨다. 물에 빠져죽은 누나에게 집착하는 우진의 트라우마를 반영해 방 전체에 수로가 흐르는 독특한 공간이 탄생했다.

세트 구상은 어떻게 시작하나.
“두 가지 순간을 떠올리며 작업한다. 관객이 영화에서 세트를 처음 볼 때, 또 배우가 처음 세트에 발을 디딜 때 두 순간이다. 배우들이 처음 세트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감정이 그 캐릭터의 감정과 비슷하거나 새로운 영감을 준다면, 성공이다. 작업하며 한번도 예산이 충분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런 제약이 도리어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 기존 생각과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게 만든다.”

부자집처럼 비싼 가구로 내부를 꾸밀 예산이 부족해서 TV 자형 수로를 만든 ‘올드보이’ 속 유지태의 집이 그런 대표적 사례다. 유지태의 편집증적인 성향과 트라우마를 역설적으로 잘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다.

영화미술 지망생들에게 해주고픈 말은.
“영화 미술을 공부하느라 다른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말길 바란다. 영화 속 세계를 창조하려면, 그 세계의 바탕이 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우리 밖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데뷔 16년인데 이제야 이 세계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할리우드 영화 스태프들의 전성기가 대부분 만년에 오는데, 한국 영화 스태프들의 평균 나이가 젊다. 그 점이 안타깝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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