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겪은 종전비사일천황항복녹음 군부어 탈취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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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45년8월15일. 일본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길고도 지루한 날이었다.
15일 정오 1분전에 시작된 천황 「히로히또」(유인)의 무조건항복방송은 일본국민에겐 치욕을 안겨주면서 극동의 전쟁을 종결시켜주었다.
그러나 이 항복방송이 나오기까지는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당시의 비사들은 전하고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45년 4월30일.
동맹국 독일의「히틀러」가 베를린의지하 방공호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은 이미 미군에 몰리고있던 일본에 전의를 상실케했으며 패색을 더욱 짙게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와 일부국민의 의식도 천황이 쉽게 항복하도록 해 주지 않았다.
육군을 주축으로 하는 주전논은 일억옥쇄를 주장하고나와 일본전체를 광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들은 천황이 은거할 가황궁을 만들어 천황에게 옮기도록 권고하기도 했으며, 항복론을 내세우고 있는 각료들을 제거하기위해 비밀리에 쿠데타를 계획하기까지 했다.
8월6일과 9일의 히로시마(광도) 나가사끼(장기)원폭투하에 이어 9일밤 자정 가까이 일본에서는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둘러싼 1차 어전회의가 열렸다.
무조건 항복의 결정은 10일새벽에 내러졌다.
항복하지 않을 경우 전쟁은 일본본토로 불붙어올것이며 패전후 국토가 분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9일의 어전회의에서 「항복한다」 는 결론이 지어졌다는소식을 전해들은 육군은 2차회의때 각료들을 감금하고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전황이 종전의 조칙를 녹음하여 이것이 다음날 전국에 방송된다는 소문을 들은 육군성 군무국원 「하다나까」(전중중건이)소좌, 육군사관학교교관 「우에하라」(상원중대낭)대위등 일단의 강경파들은 항복방송을 막기로 결의했다.
우선 한부대가 동경중앙방송국으로 가 그곳 기술자들로부터 녹음반을 궁중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른 한부대는 근위 제1사단 사령부의 「모리」(삼규)사단장을 만났다.
그들은 『천황이 간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조칙을 만들었으니 방송을 저지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모리」사단장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만약쿠데타에 참가할 의사가 없으면 「이를 지지하라」 는 명령서에 사인만이라도 해 달라』 고 강요했다.
2가지 요구가 모두 거부당하자 그들은 「모리」 사단장을 총으로 쏴 죽이고 명령서에 그의 도장을 찍었다.
이 명령은 당시 궁내성을 수비하고 있던 부대에도 전달되었다.
그들은 「모리」사단장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강정파들은 곧 궁내성을 습격, 청사안의 내부(내대신)집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궁내성에 녹음반이 보관돼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부직을 맡고있던 「기도」(목호)는 3, 4일간 잠을 못잤기 때문에 조칙의 녹음이 끝나자 집무실로 돌아와 마루위에서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시종장 한사람이 와서 그를 깨우고 『근위사단이 반란을 일으킨것 같다』고 전했다.
「기도」 는 재빨리 기밀서류를 세면장에 넣어 물로 흘려내려보내고 자신은 성사의 지하에있는 금고보관실에 숨어버렸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기도」 가 집무실을 나간지 10분후에 「하다나까」 소좌와 그 부하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성사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 심문했지만 「기도」 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위사단은 이미 황궁을 포위했고 사람의 출입은 금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녹음반은 황후의 제안으로 황후의 여관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 여관은 녹음반을 자기방으로 가져가 금고안에 보관하고 이금고는 옛중국식의 족자뒤에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이 여관은 동료3명과 함께 그 족자 아래서 잠자는척하고 있었다.
날이밝자 곧 구원대가 왔다.
강경파는 그때 한가지 오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궁안의 전화선을 모두 차단했지만 단 한개의 선이 남아있었다는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해군군령부의 직통선이었다.
그래서 이 선으로 외부와의 연락이되고 강경파가 녹음반을 압수하려 하는동안 「다나까」 (전중정일) 동부군관구사령관이 궁내성에 들어가 이들을 체포했다.
「다나까」 는 강경파에게 천황의 결단을 의심하고 감히 천황을 욕보인것을 호되게 꾸짖었다.
「하다나까」 소좌등은 당초의목적을 도저히 달성할수 없다는것을 알고 곧 자신들이 법한 부끄러운 행동을 사죄했다.
그리고 강경파들은 황궁앞 광장에 나가 궁성에 요배하고 옛날식으로 할복자살했다.
이어 몇시간동안 이 광장에서는 할복자살이 계속됐다.
이렇게하여 녹음반은 누구의 손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천황은 무사했다.
그리고 8월15일 정오, 일본국민은 라디오주변에 모여들어 천황이 행하는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일본에서는 이방송의 수신을 위해 특별전력이 공급되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날 천황이 그 자신의 방송을 들은 라디으는 남방전선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미국제였다.
미제이기 때문에 고성능으로 잡음이 없다하여 육군부대에서 진상한 것이었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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