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신성일·김지미주연 영화 『길소뜸』촬영현장|땡볕아래 솜옷입고 "복중의 겨울"연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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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지만 영화촬영장엔 계절이 따로 없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속에서도 카메라앞에선 눈보라가 휘날리는가하면 낙엽이 뒹굴기도한다.
○…지난 24일 충북단양군어상천면소재지-. 영화『길소뜸』의 촬영장엔 때아니게 누비솜옷을 겹겹이 껴입은 피난민들이 대열을 이뤘다.
임권택감독의 『레디 고!』소리가 떨어지자 공중에서 갑자기 눈보라가 휘날리며 카메라가 피난민대열사이를 누비기 시작한다. 온몸에선 비지땀을 줄줄 흘려가면서도 두손을 호호 불어가며 몸을 떠는 엑스트러들의 연기가 일품이다.
이 「한겨울의 피난민」장면을 찍기위해 10여명의 스태프들은 마을길 바닥에 하얀석회가루와 굵은 소금을 4백여가마나 뿌려놓았다. 그래도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은 아니고 카메라상엔 희끗희끗한 잔설정도로밖에 비치질 않는다.
『어이, 눈 뿌려. 왕창왕창 뿌리라구!』
임감독의 재촉에 또 한 팀의 스태프들이 커다란 선풍기로 스티로폴가루를 뿌리느라 진땀을 흘린다.
10초짜리 한 커트를 찍기위해 3백여가마의 스티로폴가루가 「눈보라」로 공중에 흩날렸다.
○…『이 영화로 기필코 올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아 지난해 못다푼 「비구니」의 한을 풀겠습니다.』
땡볕아래서 땀을 줄줄 흘려가며 핸드마이크와 워키토키에 쉰 목을 소리쳐대는 임감독의 모습은 신들린 사람 바로 그것이었다.
영화내용은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만드는 팀은 『비구니』의 연장이다.
감독 임권택, 주연 김지미, 촬영 정일성, 시나리오 송길한-.
지난해 『비구니』를 만들려던 이 4명의 영화인들이 그대로 팀을 이뤄 『길소뜸』의 제작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있다.
『길소뜸』은 6·25전쟁전 주인공인 화영(김지미)과 동진(신성일)이 평화로운 소년기를 보낸 황해도연백평야에 있는 한시골마을의 이름. 전쟁으로 헤어진 이들은 33년만에 중년이되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통해 감격적으로 재회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세월속에 이들은 너무나 다른삶을 살아왔다.
○…한겨울의 피난민대열장면 촬영 다음날엔 다시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며 멀쩡한 마을 곳곳에서 굉음과함께 폭발물이 터지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6·25전쟁중의 공습장면이다. 스태프들이 밤새 몇번씩 확인해가며 촬영용 폭탄을 설치하고 마을주민들을 대피시켰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새끼 밴 암소가 폭음에 놀라 새끼를 조산하고 민가로 뛰어드는가하면 높이 2m가량의 막걸리독이 깨지며 마을앞까지 막걸리가 흥건히 넘쳐흐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촬영전에 마을주민들에게 간곡히 취지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건만 일부에선 보상시비가 벌어져 촬영이 중단.
다시 촬영에 들어갈땐 마을주민들을 즉석 엑스트러로 기용하며 현장에서 단체 연기지도를 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중견배우 김지미씨와 신성일씨가 지난73년 신상옥감독의 『이별』이후 12년만에 만나 치열한 연기대결을 보였다.
이들은 차를 함께 타고 잃어버린 아들(신일용)을 찾아가는 한 커트짜리 신을 찍으면서도 서로 좀더 만족스런 연기를 하겠다며 고집하는통에 보통때보다 20배가 넘는 4백자의 필름을 소비하기도.
김씨는 이 영화를 위해 처음으로 촬영에 자신의 집내부를 촬영장으로 제공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김씨는 『연기자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촬영에 들어서면 정말 이 불볕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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