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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할 수 없는 위험 잘 파악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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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2면

1 1953년 5월 29일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힐러리 촬영.

5월 29일은 산악인에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날이다. 네팔과 중국(티베트) 간의 국경선에 위치해 네팔에선 시가르마타(‘하늘의 이마’), 중국에서는 초모랑마(티베트어로 ‘하늘의 어머니’, 珠穆朗瑪)로 각기 불리는 해발 기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인류가 최초로 등정한 날인 동시에 에베레스트 등정과 관련된 인명 사고가 잇따라 발생한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63년 전인, 1953년 5월 29일 영국연방의 에베레스트 원정대 일원으로 참가한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가 인도 국적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기록상으론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37년 전인 1979년 5월 29일에는 산악인 고상돈이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뒤 하산하다가 빙벽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고상돈은 한국인의 에베레스트 도전 6년만인 1977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인물이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는 당시의 유행어는 고상돈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무전기로 교신한 내역으로 알려져 있다.


11년 전인 2005년 5월 29일은 휴먼원정대가 에베레스트 기슭에서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돌무덤을 만들어 묻은 날이기도 하다. 박무택은 2004년 5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 하산하다 조난당했고 그를 구하러 간 백준호도 실종되고 말았다. 박무택의 시신은 엄홍길이 수습하러 갈 때까지 로프에 걸린 채 산 기슭에 방치돼 있었다. 이는 영화 ‘히말라야’의 줄거리이기도 하다.

2 2005년 6월 4일 엄홍길 등반대장을 비롯한 휴먼원정대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마련된 고 백준호·박무택·장민 대원 등의 위령제에 참석해 절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중앙포토]

“지지자 이탈로 새누리 참패”설명은 하나마나고산 등정은 리스크(risk)로 가득 차 있다. 리스크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모든 걸 피해서는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실패로 귀결될 리스크는 감수하지 않는 게 낫다. 결과론적으론 63년 전 힐러리와 11년 전 엄홍길의 리스크 감수는 현명한 선택이었고, 37년 전의 고상돈과 12년 전의 박무택·백준호는 리스크를 피했어야 했다. 문제는 그런 조언을 사전에는 주지 못하고 사후에야 한다는 점이다.

4·13 총선 방송사 출구조사가 발표된 지난달 13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방송을 지켜보던 당 지도부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등장하는 각종 논평은 인과관계에 근거한 원인이 아니라, 결과 그 자체를 부연 설명하는 하나마나 한 동어반복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4·13 총선에서의 새누리당 참패가 새누리당 지지자의 이탈로 불가피했다는 설명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만일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지지자가 결집해서 그렇다고 설명했을 것이다. 실제 선거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강변하면서 내놓는 설명치곤 너무 궁색하다. 결과를 관찰한 뒤 단지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예측이 아니다. 결과에 영향을 미칠 실제 원인을 분석하거나 아니면 결과보다 앞서 발생하는 선행 현상을 관찰하여 사전에 제시하는 것이 예측이다.


당연한 결과였다고 사건 발생 후에 강변하는 사람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는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인용하면서 심오한 철학적 해석은 사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미네르바 부엉이’ 운운 자체가 구체적인 논증 없이 헤겔의 이름을 빌려 설득하려는 권위 이용의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표현 또한 사건 발생 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재난 관리자의 입장에선 사전에 정말 명확하게 예고됐더라면 그 재난을 예방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발생했다고 볼 것이다. 만일 사전에 예고됐지만 책임자가 그 예고를 무시했다면 그것은 책임자의 잘못이다.


9·11테러, 냉전 종식, 소련 붕괴 등의 사건에서도 대다수 예측은 사후 설명에 불과했다. 물론 사전에 그런 사건의 가능성에 대해 전망한 보고서도 있었다. 이런 경우조차 100% 적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성을 사전에 명확하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아무런 기록 없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사후에 강변하는 것보다는 신뢰할 만하다.


 올바른 정보와 논리적 추론이 바탕돼야회사든 국가든 지도자에게 서로 다른 결과를 전망하는 여러 보고가 제출된다. 지도자와 그의 측근은 근거를 따져 여러 전망을 취사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근거가 없는 추측은 ‘가슴으로 헤아린다’는 의미의 ‘억측(臆測)’이라고 부른다. 말로 들으면 그럴듯한 내용도 다시 생각하면 억측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올바른 정보와 논리적 추론이라는 도구를 습득해야 리스크의 분포 정도를 정확하게 평가해 리스크의 감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과거 데이터는 가보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는 원천이다. 다른 대안이 없는 한, 미래는 과거 추세의 연장선에서 예측할 수밖에 없다. 매년 성장이 전년도의 2배를 기록했다면 내년에는 작년의 4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미래의 리스크 역시 해당 사건이 과거에 발생한 빈도로 전망한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내려온 추세가 그대로 미래까지 확장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거에 어떤 특정 사고를 겪지 않은 사람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해당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 반면, 심각한 사고를 겪은 사람은 사고의 재발 가능성을 주관적으로 높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한 회사의 영업실적이 올해에 좋으면 내년에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한 정당이 어떤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다음 선거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 농구 슛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사에서 최근에 성공한 자가 앞으로도 연이어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는 ‘핫 핸드(hot hand)’로 불린다.


실제로 돈이 돈을 불러 명성과 간판으로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행에 성공한 연예인이나 작가에게 고정 팬이 생겨 다음 작품의 흥행에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 발생하기도 하고, 반대로 성공 잠재력이 매우 큰 기업조차 지난해의 나쁜 영업실적이 부도 소문으로 확장돼 결국 파산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다.


실력뿐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하는 주식투자 경연대회나 도박대회에서 한 번 우승한 자가 다시 우승하기란 쉽지 않다. 토너먼트에서의 우승은 한 번도 패하지 않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패(無敗)의 우승자는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토너먼트의 특징이다. 그 희박한 확률을 이뤄낸 우승자가 앞으로의 게임에서도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승리 국가를 성공적으로 예측했던 문어 파울은 이후 다른 예측에는 실패했다. 또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경기에서 16강 진출 국가를 100% 정확히 예측했다고 알려진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은 4강 진출 국가를 다 맞추지는 못했다.


여기서 족집게 도사로 인정받는 요령을 알려줄까 한다. 예컨대, 100가지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의 결과를 맞추는 게임에서 100가지 모든 경우에 각기 다른 이름으로 배팅을 거는 것이다. 틀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조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1%의 가능성을 맞춘 주인공으로 등극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양한 결과를 모두 각기 예측해 놓으면 적중률 100%의 예측 하나는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족집게 도사로 인정받은 이후 발생할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무패의 신화도 계속 싸우다 보면 깨지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지지도가 조사된 이래 대통령 선거 1년 전의 현직 대통령 지지율이 50% 미만이면 야당 후보가 예외 없이 당선됐다는 신화가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2011년 11월 지지율이 40%대 초반에 머물렀던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그 신화는 단순 가능성으로만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리스크의 두 얼굴… ‘핫 핸드’와 ‘블랙스완’리스크를 통제할 수 없는 한, 핫 핸드의 믿음은 오류다. 과거에 여러 차례 성공했다고 해서 미래에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특정한 쪽으로 쏠려 발생했기 때문에 고루 분포하려면 미래는 반대쪽으로 쏠려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 또한 오류다.


자신의 과거 성공을 실력에 의한 것으로 믿고 과거 실패를 나쁜 운으로만 치부하는 사람은 실패를 다시 겪기 쉽다. 운이나 리스크는 무작위로 분포한다. 뒤집어 말하면, 무작위가 아니라 한쪽으로 쏠린 운이나 리스크에는 실력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 계속 행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실력자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실패를 줄인다.


리스크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원리 하나는 1건의 큰 사고 발생 이전에 29건의 작은 사고 그리고 경미한 300건의 전조가 나타난다는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이다. 그러나 큰 사고는 300번의 전조를 거친 뒤에 발생할 뿐 아니라, 한두 번만의 전조를 보인 뒤 바로 발생할 수도 있다. 동일한 원인과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결과가 발생한다는 전제 자체가 비논리적이지만 하인리히 법칙이 유독 한국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만큼 각종 재난 사고가 많다는 의미이다. 하인리히 법칙의 은유적 표현이 강조하는 점은 전조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가 어쨌든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방심하다간 결국 큰 사고를 겪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전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대비한다면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드물지만 발생하게 되면 엄청난 효과를 갖는 사건은 ‘블랙스완’으로 불린다. 당사자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블랙스완 즉 글자 그대로 검은 백조이다. 야생 백조를 그리러 가자고 해서 흰색 물감 위주로 가져갔더니 현장에 검은 백조가 있으면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 검은 백조에 대비할 것인지 아니면 가능성이 낮으니 그냥 무시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블랙스완에 대한 대비 여부는 그 발생 가능성과 그 심각성 정도에 달려 있다. 블랙스완의 가능성이 클수록 또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블랙스완이 엄청나게 심각한 결과를 몰고 올수록 블랙스완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침몰, 메르스 확산 등 생각치도 못한 일련의 사고로 안타깝고 허무한 인명 손실을 겪고 있다. 엄홍길은 등정을 ‘정복’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태도일 것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자연 앞에서의 겸손, 치밀한 분석 등이 블랙스완에 대한 대비를 가능하게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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