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전차"…최고의 공격수로 자리굳힌 김주성 "축구는 내인생의 전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축구는 내 생활의 전부입니다. 축구만으로 한 인생을 살 작정입니다』
윌드컵대표팀의 유일한 10대의 새기수 김주성(김주성·19조선대). 김은 축구를 위해 이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경기때마다 혼을 불태우듯 지칠줄 모르는 정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런 정신력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최고의 공격수로 촉망되는 「막내동이」로 월드컵대표팀에 합류한 김은 인도네시아와의 윌드컵예선 l, 2차전에서 잇따라 마무리꼴을 터뜨리는 수훈으로 기라성같은 프로선배들의 틈바구니에서 스타의 자리를 굳힌 기린아. 6윌의 대통령컵축구대회에서 88올림픽팀의 샛별로 떠오른 후 불과 1개월여만에 일약 거성(거성) 으로 발돋음하고 있다. 순간적인 돌파력과 정교한 패스가 일품이며 지칠줄 모르고 녹색그라운드를 누비는 체력까지 겸비, 「달리는 전차」라는 닉네임이 이같은 김의 장점을 대변한다.
김주성은 금년 1월1일 올림픽대표팀소속 당시 월드컵팀과의 대결에서 결승꼴을 터뜨려 처음으로 주목되면서 대통령컵국제대회 때 4꼴을 기록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84년1월 청소년대표로 선발된 이래 불과 1년반사이에 기량이 일취월장, 윌드컵대표팀의 부동의 스타로 자리잡기까지는 형극의 길을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력으로 극복한 결실이다.
김은 속초중앙국교 3년때 축구를 시작, 서울성수중학에 진학했다. 성수중2년때 부모가 이혼하는 충격으로 자취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선수생활을한 그는 공교롭게도 윌드컵대표팀에서 윈쪽날개를 놓고 경쟁을벌이는 김석원(김석원)의 아버지 김찬기(김찬기)씨가 코치로 재직하면 중앙고에 진학 김씨의 각별한 지도로 축구에 눈을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명선수였던 김은 대학의 관심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광주조선대로 진학해야하는 설움을 맛보아야했다.
『명문대학진학에서 밀려난 설움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아보상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남몰래 흘린땀이 자신의 발전에 큰도움이 됐다며 김은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고한다.
새벽과 어두운밤 고독한 그라운드에서 홀로 볼과 씨름하는 각고의 노력이 1년후에 결실을 보아 아시아청소년대회(84년3윌·방글라데시)파견선발전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 대표로 발탁됐으며 올림픽대표팀을 거쳐 오늘의 김주성이. 탄생했다.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김정남 (김정남)감독의 축구와 팀웍과 기동력을 바탕으로한 시스팀플레이의 박종환(박종환)감독은 서로 스타일이 다르지만 저는 양쪽의 그러한 강점을 모두익히고 싶습니다』 1m76cm의 키에 67kg의 날렵한 체구와 청순한 마스크를 지닌 김은 팀의 막내동이로 선배들에대한 깍듯한 매너를 지켜 그들의 귀염도 독자지하고 있다.
몇몇 프로팀들로 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았다는 김은 보수를 떠나 인간적으로 자신을 아껴주고 키워줄수 있는 지도자를 찾아 가겠다고 팀 선택기준을 말한다.
『그라운드에서 볼이 춤을추면 그에따라 제눈에는 불꽃이 튀는듯 합니다. 어릴적 싸움을 할때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극도의 긴장과 흥분속에서도 상대의 세밀한 몸놀림을 쫒으며 헛점을 노립니다. 축구를 잘하려면 센스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서 김은 자신의 가장큰약점이 『머리가 아직 둔해 생각이 좁은것』이라고 싱굿 웃었다. <문일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