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에서 과거보다 미래를 말한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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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서장은 주히로시마 총영사 기고
히로시마 시민들 관심사도 미래
일본 피폭단체들 사죄 요구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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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총영사

2년 전쯤. 주히로시마 총영사로 부임한 필자의 첫 업무는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한 것이었다. 평화기념공원이 히로시마의 성지라면 한국인 위령비는 우리 동포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발걸음을 조금만 더 옮겨 우리의 성지도 찾아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로부터 2만5845일, 인류 사상 초유의 원폭 투하로부터 71년이 지난 27일. 원폭을 떨어뜨린 나라와 그 원폭에 많은 목숨을 잃은 나라의 정상이 ‘그라운드 제로’에 함께 섰다.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한국인 피폭자도 언급하면서 분쟁의 인류역사를 망라한 뒤 원폭의 교훈을 배우겠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얼마 전 이번 방문 준비 차 현지에 온 미국 측 주요 인사와 만난 적이 있다. 때가 때인 만큼 오바마 대통령 방문에 대해 의견을 나눴는데, 그는 이번 방문은 철저하게 미래지향이어야 하고 ‘과거’가 연상되는 내용은 일절 사절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는지 일본 측, 심지어 히로시마의 피폭자단체들까지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를 요구치 않겠다고 앞다투어 발표했다.

미·일 양국 각각의 이해방정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백악관은 베트남·히로시마 연쇄 방문으로 20세기의 흔적을 지우고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로 대변되는 중국 봉쇄 전략을 다지는 동시에 오바마 대통령 퇴임 전에 반핵평화주의자의 이미지를 더 어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이 줄곧 요청해 온 구상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미·일 정상회담에서 오키나와 미 군무원의 일본 여성 살해사건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를 받은 아베 총리는 이세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간 내내 이세신궁에서부터 히로시마까지 오바마 대통령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철벽공조를 주도적으로 마무리해 자신의 입지를 과시했다.

아직도 한·일 과거사의 여러 고통을 잊을 수 없는 우리가 이 모든 장면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91세의 쓰보이 등 피폭자 대표 두 명이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웃음과 눈물을 보이는 장면에서 이번 방문의 또 다른 면모를 생각하게 됐다. 과연 이들이 아베 정권의 대외정책에 동의해서 저 자리에 섰을까. 현장에 참석한 히로시마 사람들 중 상당수는 평소 안보법안 등 아베 정권의 정책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목소리로 이번 방문을 희망했고 이를 실현시켰다. 히로시마 시민들의 주 관심사는 ‘미래’였고 이 ‘미래’를 향한 걸음이 바빠서 아픈 과거를 가슴에 묻고 참은 것으로 보였다. 반면 우리는 한국인 원폭 피해라는 더욱 애통한 ‘과거’만 이야기했을 뿐 이를 ‘미래’에 연결 지으려는 노력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다. 위령비 방문, 그리고 현지를 찾은 피폭대표단의 사죄·보상 요구까지…. 이 때문에 미래만을 이야기하겠다는 자리에 우리가 같이 설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고 싶다. 과거는 잊지 않되 그 과거를 미래로 잇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세계가 우리 말에 귀 기울이도록 힘을 기르자고.

지난 2년간 8월 5일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제에서 내가 낭독했던 추도사는 “나라 잃고 만리타국에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영령들이여, 살아남은 저희가 다시는 이런 참화가 없도록 조국을 더욱 강건히 만들겠습니다”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가고 남은 히로시마에서 나는 그 말을 다시 한번 되뇐다.

서장은 주히로시마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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