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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인생 뚫어 보는 송곳…호기심, 끈질긴 관찰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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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등단 59년 맞은 황동규 시인



| “시인들이 늙으면 대개 시를 망쳐
내 시 힘 떨어지면 알려달라 당부
세상에 고정된 진실 같은 건 없어
사태 뒤집어보며 생각의 긴장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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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이 코앞인데 여전히 현역이다. 올해 호암상 예술상을 받는 시인 황동규는 “항상 긴장하려고 노력해선지 계속 시가 나온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변화와 반역의 시인. 올해 호암상 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인 황동규(78·서울대 명예교수)씨는 흔히 이렇게 얘기된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나’, 새로운 길을 꿈꾸겠지만 황씨의 경우 그 족적이 유난히 뚜렷하다는 뜻일 게다.

스치듯 살펴봐도 그런 면모가 눈에 들어온다. ‘즐거운 편지(고3 때 써두었던 1958년 등단작이다!)’ 같은 국민 애송시 수준의 사랑시가 있는가 하면, 80년대 10여 년간 ‘풍장’ 연작을 통해 죽음이라는 실존의 운명과 싸웠다. ‘홀로움(따뜻한 외로움이라는 뜻이다)’ 같은 시어(詩語)를 발명하고, ‘극(劇)서정시’ 개념을 도입해 단순 서정시에 반기를 들었다. 부분 변화가 아니라 자기 부정도 마다하지 않는, 전방위적 갱신의 시인이라는 얘기다.

한 예술가의 평생 업적 전체에 주어지는 호암상이 황씨에게 돌아간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근 60년 간 15권의 시집을 낸 그는 올해 16번째 시집을 낸다. 여전히 현역인 거다. 지난 19일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동으로 황씨를 찾아갔다. 여전히 눈빛이 맑은 그는 반갑다며 기자를 와락 끌어 안았다. 뜨겁기까지 했다. 호암상 시상식은 6월1일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58년에 등단하셨으니 햇수로 59년째다.
“정년 퇴임한 지 13년 됐는데 그 전 40년 동안보다 좋은 시를 더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시인들이 늙으면 대개 시를 망치는데 앞으로 1, 2년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쓰는 건 책으로 묶는다면 17번째 시집에 실릴 텐데, 시집 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지.”
꾸준한 시 수준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하고, 최대한 관찰해야 한다.”
결심 혹은 자기 검열도 철저해야 할 것 같다.
“피아니스트가 하루 연습 안 하면 자기가 알고, 이틀 연습 안 하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 안 하면 세상이 안다고 한다. 시는 거꾸로다. 시인이 자기를 모른다. 미당 서정주 시인도 전집 5권 중에 앞에 1권과 2권의 3분의 1을 빼면 나머지는 쓸 게 별로 없다. 앞의 시들만으로 미당 시의 명성에 지장은 없지만. 내 시의 힘이 떨어지면 바로 얘기해달라고 주변에 항상 당부한다.”
어딜 가나 좌장이신 경우가 많을 텐데 사람들이 그런 입바른 소리를 하겠나.
“내가 그 사람들 솔직하게 대하는데 안 해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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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왼쪽), 2013년 시집 『사는 기쁨』.

생전 절친했던 평론가 김현은 황씨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해설에서 황씨의 세계를 ‘방법론적 긴장’으로 요약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스스로 긴장 상황을 연출하는 게 황씨의 ‘방법’이라는 얘기였다.

황씨는 “그때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결국 삶과 어떻게 싸우느냐, 삶의 긴장 문제”라고 했다. “신문을 읽으며 흥분을 안 하는데 사태를 뒤집어서도 보기 때문”이라며 “세상에 고정된 진실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신문을 나처럼 읽으면 진실 비슷한 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의 긴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도 여러 편 썼다.
“독자가 없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안 찾아오면 시인이 찾아가야지.”
시에 유머도 있다.
“인간이 인간과 통하고 싶은 욕망에서 유머가 나온다. 동등하지 않으면 유머는 억압이 된다.”
시를 정의한다면.
“대답 못한다. 하두 여러가지여서다. 한 가지만 강조하는 대답이 되기 쉽다.”
시를 왜 읽어야 하나.
“소설은 왜 읽나. 시도 소설만큼 재미 있다. 둘 다 송곳인데 시가 더 예리하다. 송곳이 필요 없는 사람은 둘 다 필요 없겠죠.”

송곳이 필요한 이유는 “인생을 깊게 보려면 뚫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황씨는 시 속에서 시적 자아가 거듭나는 과정, 사소하더라도 자신이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싶고, 그걸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런 게 잘 안 되면 언제라도 시 쓰기를 그만두겠다는 게 요즘 황씨의 방법론이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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