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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발해 연구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 주말 중앙일보지상에는 찬란한 발해유물들이 컬러로 선보여 독자들을 황홀 하게했다. 최근 중공에서 잇달아 발굴되는 발해유물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웅대했으나 잊혀진 왕국, 발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느끼게된다.
당나라 칙천무후 성력년간(698∼699) 에 나라를 세워 후당의 천성원년 (926)까지 15대 2백20여년간 번영,「해동의 성국」으로 까지 불렸던 발해는 보통 수수께끼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그이유는 그들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사료로『신당서』「발해부」과 『구당서』「발해부」『당회요』에 보이는 몇줄의 기사가 참고가 될뿐이다.
일례로 발해의 건국자는 누구인가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대조영이라는 설이 있는가하면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이라는 설, 또는 두사람은 동일인이라는 설까지 있다.『구당서』 「발해부」엔 우리가 잘 알고있는 대조영을 발해건국의 시조로하고있다.
그보다 우리에게 더 관심있는 문제는 대조영을 중심으로 발해왕국울 건국한 주체세력이 어느 종족에 속하느냐하는 논쟁이다.
우리나라에선 조선조 정조이후 유득공을 비롯, 허미· 한치윤· 한진서·정약용·서상우·홍석주등의 연구를 통해 꾸준히 발해사를 한국사에 펀입시켜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유득공은『발해고』에서 고려시대에 발해사가 한국사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점을 서글퍼 하면서『대체로 대씨는 누구였던가? 우리 고(구)려인 이었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디였던가?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일본학계의 동향은 냉랭했다. 특히 만병통치의 합리화라는 국책에 편승, 1945년이전 한때는 동양사의 어느분야에 뒤지지 않을만큼 활기를 띠었던 일본의 발해사연구에선 고구려와 발해의「계승」관계를 인정하려 하지않았다. 심지어 고구려조차 한국사에서 제외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한편 빈약한 기록에 의존, 논정을 거듭하던 발해사연구에 한줄기 빛을 뿜은 것은 바로 유적조사와 발굴의 성과였다. 대표적인 조사, 발굴은 발해의 중경 현덕부와 동경 용원부자리에서 이뤄졌다.
유적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문헌만으로 알수 없었던 발해문화의 내용이 점차 알려지고 그 내용이 고구려문화의 연장 또는 변용이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 종전시까지도 전세가 불리한 악조건을 무릎쓰고 높아만 가던 일본의 발해사연구 열이 수그러진 점과는 대조적으로 중공의 연구열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중공정권이 대륙을 지배한 직후인 1949년 돈화현의 육정산에서 정혜공주묘를 발굴한 이후, 그 부근의 산성등의 조사발굴이 진행돼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조영이 처음 정착했다는 동모산이 돈화현 육정산일대의 발해고분을 통해 육정산부근이란 점도 밝혀졌다.
중공에 이은 최근 소련의 발해사연구열 또한 주목해야겠다.
중공과 소련학계가 이렇듯 성과를 올리고 있는 반면 일찍부터 발해사연구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고 현재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의 연구동향은 적막한 감이 없지않다.
빈약하기 짝이없는 사료를 메워야 할 발해의 유적이 우리에겐 답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과 아울러 그 조사보고서조차 마음대로 입수 할수 없는 현실이 큰 애로점이라 하지 않을수없다.
이우성씨는 지난70년 전국역사학대회에서「삼국사기와발해문제」라는 논문을 발표, 통일신라이후의 국사체계를 북의 발해왕국, 남의 신리로 하는 남북국시대사로 엮어야한다는 유득공의 주장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모색한바 있으며 이와 거의 같은 때 나온 한우근씨의 개설서『한국통사』는 비로소 유득공의 소망이 그대로 이뤄진바 있다.
발해사의 연구조건은 너무도 어려운 험로이지만 그 연구를 중단한다는 것은 모처럼 개척한 우리 선인들의 민족사에 대한 연구업적을 말소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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