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7)제 82화 출판의 길 40년(7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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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네스코는 아시아지역의 도서개발계획을 작성하고 1966년 동경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에 나는 당시 출협의 한만년부회장 (일호각대표)과 유익위이사(범문사대표)대표로 파견했다.
이 동경회의는 도서개발 목표를 수립했다. 즉 1980년까지 아시아 각 나라는 도서공급 확장을 위한 최저목표를 「연간 인구 1인당 1백60면」으로 책정하고, 또 각국은 도서개발자금 조달을 위해 저리재정의 투융자등 가능성과 신용대부는 각 나라 개발은행이 주목할것을 결의했다.
우리 출협은 이와 같은 유네스코의 활동에 호응하여 l968년 4월 사흘간의 일정으로 「도서와 국가발전에 관한 국제회의」를 주최했다. 미국·일본·중국(당시대만)·태국·인도· 말레이지아·월남·인도네시아등에서 온 외국 출판전문가 13명과 국내에서는 우선 출판인 50명, 그리고 당시 정책수립가로서 최규남 (경제과학심의위원) 강주진 (국회도서관장) 최낙구(문교부편수국장)제씨, 학계에서 윤태림(숙대총장) 현승종(고대교수) 민석홍(서울대교수) 민병기(고대교수) 이만갑(서울대교수)제씨, 언론계에서 김규환·김용구·홍사중제씨, 그리고 오병헌(성대) 이봉모(한양대)의 우석순(중대) 홍연직(동대) 김양우(단대)교수 등 교양학부장이 대거참석하여 우리나라 출판문화 진흥책을 논의했다. 국제회의의 기조연설은 당시 서울대총장 최문환박사가, 그리고 「국가발전 도구로서의 도서의 역할」이란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 회의는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특히 출협이 추진중인 도서개발위원회와 「출판금고」 의 설치가 긴요하고 이 기구의 설치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이 국제회의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다음달 5월 정부·여당 (공화당) 정책심의회의는 「출판금고」의 설치에 합의했다. 드디어 1969년 「출판금고」 발기인회를 구성했다. 발기인 7명은 한만년·김광수·조상원·민영빈·김원룡·김명엽제씨와 나였다. 우리출협은 이렇게 하여 오늘의 「출판금고」산파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7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출판금고」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발족당시 회원 가입금 4백l8만원으로 시작, 문예진흥기금 지원 5억원과 약간의 국고보조 지원 등으로 현재 11억원의 기금이 조성된 것이다. 「출판금고」는 양서지원사업 등으로 이루어진 회비수입이 기금으로 합산된 것이다. 개미 금탑 모으듯이 「출판금고」의 기금이 이룩되었는데, 최근 「출판금고」의 발전책에 관한 논의가 정부와 「출판금고」측간에 진행중이다.
앞으로 「출판금고」는 설립 당초의 취지대로 「출판물 유통의 원활화」란 사업을 달성시키는데 그 발전책이 도모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내가 11년간 출협회장을 연임하는동안 나와같이 출협 정관에 정한 목적사업을 추진하는데 함께 협력한 출판인을 소개하려 했으나 이미 지면이 다 되었다. 출협의 기금을 조성하는데 공이 컸던 역대 총무상무(이 자리는 관례가 당시 검인정회사의 상임을 영입했다)제씨의 노고에 대해 감사한다. 우리 출협은 창립이래 회장단·상무이사가 모두 무보수로 봉사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공동의 선」이 「출판문화회관」을 세우는데도 큰 힘이 되었다.
나는 회관의 부지를 사는 기금을 다음 한만년회장에게 인계했다. 한회장은 불과 6, 7개월동안 공사비 1억5천만원을 회원의 성금으로 확보했다. 1975년 6월27일 「출판문화회관」건물이 중앙청이 바로 건너다 보이는 자리에 멋지게 세워졌다. 당시 김종필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문공·문교·통일원장관이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동안 출협은 명실공히 출판문화의 구심점이요, 대변기관이었다. 그리고 저작자의 권익을 위하는것이 출판 문화를 부추기는 것이므로 인세에 대한 소득세 감면 운동에 앞장 서서 정부와 국회를 설득했다. 이런 출판계의 활동과 교육의 급격한 보급에 크게 힘입어 현재 연간 출판종수 3만대를 돌파하는 세계에서 10위권의 출판국으로 성장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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