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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강남역 10번 출구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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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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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강남역 10번 출구에선 ‘남혐 vs 여혐 충돌’ ‘성대결’ 같은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장면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한쪽에선 여성이어서 살해당한 고인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졌고, 다른 쪽에선 시위와 충돌이 일어나고, 구석구석에선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벌였다. 추모쪽지를 쓰는 추모객들 중엔 여성만큼 남성도 많았고, 한 남성은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발언을 쏟아놓는 ‘일베’들을 향해 끈질기게 날선 공격을 폈다.

지난 주말 반나절가량 인파 속에 섞여 바라본 이 공간에서의 충돌은 성별로 편을 갈라 서로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살해(femicide)라는 오래된 반문명적 악습에 반발하는 진영과 여전히 옹호하려는 수구진영 간의 충돌로 보였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이를 놓고 성 갈등이니 이성 혐오니 하며 대결 상황에만 집중하는 상투적이고 단세포적인 센세이셔널리즘이었다.

개인적으론 ‘강남역 10번 출구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도 지구적으로 확산 중인 ‘반(反)페미사이드 운동’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틈틈이 페미사이드를 지적하면서 허공에 발차기하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는데 이젠 동지를 얻은 듯해 반가웠다.

페미사이드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현상이다. 확장하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혐오문화 등을 총체적으로 이른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인류사의 DNA 안에 꼭꼭 자리잡은 광기 어린 악습이다. 아랍권에선 집안에서 반대하는 남성과 연애하는 딸을 가족들이 살해하는 걸 ‘명예살인’이라며 미화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선 ‘태양의 후예’에서 서대영 상사와 연애를 한 윤명주 중위도 명예살인 대상이 될 필요충분 조건에 해당한다.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인류는 여성살해, 페미사이드를 자행했다.

슬픈 건 21세기에도 반문명적 페미사이드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거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은 성격만 보면 경찰의 설명대로 ‘조현병 환자의 피해망상에 의한 살인’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무시하는 여자는 죽여도 된다’는, 정신병 환자에게도 각인된 사고체계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자가 무시해서’ ‘너무 나불대서’ ‘헤어지자고 해서’ 등 여성을 살해한 남성들이 털어놓는 살해 이유들은 남성보다 열등하기를 거부하는 여성은 죽여도 된다는 관념을 드러낸다.

페미사이드는 낯모르는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보다 남편·애인·가족 등 친근한 사이에서 자행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은 페미사이드 문화의 한 단면이다. 워낙 인류사적 현상이라 이걸 사회문제로 인식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페미사이드가 사회문제로 제기된 건 1990년대 서구 선진국에서부터였다.

그러다 최근 들어 파라과이·칠레·멕시코 등 여성살해가 빈번한 중남미권부터 반페미사이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일부 남미국가에선 여성살해 개념을 도입한 형법 개정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선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페미사이드 시위가 벌어졌고, 축구스타 메시도 이 운동에 동참해 널리 알렸다. 지난달엔 멕시코에서 반페미사이드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2016년 5월 페미사이드에 관한 한 남미 못잖은 대한민국에서도 마침내 반페미사이드 외침이 시작됐다.

강남역 10번 출구 현상은 남녀의 충돌이 아니다. 반문명 vs 문명의 충돌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축적된 반문명을 끝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악습에 저항하려면 그것이 내뿜는 포악질과 행패도 넘어야 한다. 지금의 갈등은 피할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대항하고 집단지성을 발휘해 해결책을 찾는 토대로 삼아야 할 일이다. 어차피 성장엔 아픔이 따른다. 정신병자의 살인사건에 호들갑 떤다고 말하지 말자. 원래 역사의 진전은 우연인 듯 보이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