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6>제82화 출판의 길 40년(69)출판문화협회 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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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가 처음으로 출협 회장직을 맡았던 해는 1962년도다. 81년도에 출협 정관을 개정할 때까지 임원의 임기는 1년이었다. 나는 제16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후 1년도 한해를 거르고는 65년도부터 계속하여 73년도까지 11년과, 그리고 6년 뒤인 79년도에 1년을 더하여 이럭저럭 변변치 못한 사람이 12년 동안이나 그 막중한 책임을 짊어졌었구나 하고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한다.
내가 회장직을 맡았던 때 나이는 53세였고, 출판에 몸담고 걸어온 햇수로는 17년이 된다. 내가 회장이 되던 1962년은 바로 출협창립으로부터 15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신향사 김창집씨가 10년, 다음 민교사 민장식씨가 1년, 다음 동국문화사 신재영씨가 2년, 다음 수도문화사 변우경씨가 2년, 이렇게 각각 회장직을 맡은 다음이 내 차례가 된다.
출판업이란 그 개성이 다른 업종에 비하여 강하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는다. 이런 업종끼리 모여 공통의 과제를 의논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그런데 내가 출판계의 공통되는 이익을 위하여 1952년 11월 발족한 한국검인정도서주식회사의 설립에 일익을 분담하여 특히 재계에 광면하다는 이유로 섭외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당시 검인정교과서 출판사 약40여사의 대표들과 비로소 교류하면서 동업자간 친선의 목적과 그 필요성을 알게 된다.
내가 출협 화장직을 맡았던 70년대 상반기로부터 70년대 하반기까지 출판계의 거래액 랭킹순위는 아무래도 검인정교과서출판업자가 아니면 높은 순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때다. 즉 그때까지는 일반단행본의 발행 종수도 많지 않았으며, 정체된 산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독자층도 극히 희박한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출협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출판사는 자연히 교과서 업자 1백여사가 주류를 형성했었다. 나는 회장 재임 12년간 좋은 친구요 협력자를 가졌다는 것을 새삼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회장이 되면서 매주 상무이사회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정기적으로 실행했다. 점심값은 물론 돌려가면서 자비 부담했다.
내가 출협을 맡았을때 출협의 1년 예산은 1백만원에도 미달했다. 사무국장·출판부장·사환, 세사람의 인건비와 사무실 임대료가 예산의 전부였다. 나는 이보다 앞서 59년도에 미국무성 초청으로 4개월간 구미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15차 국제출판협회 총회가 열려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여행이 나에게 출판인으로서의 식견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특히 미국 국회도서관을 돌아볼때 북한에서 간행된 서적은 와 있는데 한국에서 간행된 책이 없는데 놀랐었다.
왜 우리 대한민국의 도서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 쪽 대답인즉 한국에서 무슨 책이 나왔는지 알아야 살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 않는가. 그런 동기로 나는 출협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한국출판연감』의 제작 출판을 최우선 사업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당시 출판 기획의 명수로 지칭되던 학원사 김익달사장을 출협의 편집담당 상무로 영입했다.
김익달사장은 이미 각종 대형사전을 출판한 경험이 있고, 출판인으로서 뛰어난 감각 소유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형편이라 이 도서목록을 편찬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 편다는데 동조하여 편집부에 임시직원 3∼4명을 채용, 착수한지 5개월사이 46판 규격에 1천페이지가 넘는 어엿한 63년판『한국출판연감』을 출판하여 우리 출판문화의 대외적 체면을 세우는 큰 경사가 이루어졌었다.
특히 이 연감을 공급하는데 당시 한국검인정교과서회사 산하 공급원인 전국 유명 서점에 공급학교 수만큼씩 할당하여 당시 발행부수 3천부를 소화했는데, 이 판매대금은 당시 출협의 재정형편으로서는 참으로 막대한 금액이었으며, 이것을 기금으로 하여 출협의 각종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밝혀두는 것이다. 다음에도 출협이야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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