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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괴벨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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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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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악마를 보았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수많은 사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가해업체 옥시의 신현우 전 대표가 지난달 말 검찰청사 앞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후 자신의 변호인에게 속삭였다는 발언이 알려지자 SNS는 들끓었다. 발단은 지난 12일 뉴시스의 보도였다. 피해자들 앞에선 사과, 뒤에선 “내 연기 어때?” 이런 자극적인 제목으로 신 전 대표의 이중성을 비난하는 온라인 기사를 내보내자 대부분의 온라인 매체가 이를 그대로 인용했다. 사람들은 ‘악마’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기사를 읽어보면 익명의 검찰 관계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카더라’ 통신만 있다. 검찰이 (살균제의 유해성을 알고도 팔았다는) 혐의를 부인하는 신 전 대표의 구속 전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앞두고 슬쩍 흘린 얘기를 당사자의 반론도 없이 받아 적은 게 전부다. 신 전 대표 측은 즉각 발언 사실을 부인했고, 발언의 출처로 지목된 검찰도 보도가 나가자 모르는 일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악마를 소환한 후였다.

김용학 연세대 총장(사회학과)이 『한국사회 대논쟁』(2012)에서 이미 진단했듯 SNS는 ‘이야기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온갖 정보가 ‘주목받기’(클릭과 ‘좋아요’) 위해 경쟁을 벌이면서 진실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그럴듯한 이야기만이 전쟁의 승자가 된다. 정치적 의도든, 아니면 그저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동기에서든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루머를 퍼뜨린다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종종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는 인민재판을 벌이기도 한다.

원래 SNS의 속성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반 대중의 거짓을 걸러내도 부족할 검찰과 언론이 공모해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확산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하고 부끄럽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아무리 크다 한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애했던 나치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며 “선동은 거짓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해명에는 수십 건의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 해프닝을 통해 우리 사회에 진실은 아무 상관없다는 괴벨스가 도처에 있는 걸 확인한 것 같아 섬뜩하다. 괴벨스의 시대엔 누구라도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악인의 모든 게 나쁘다며 돌을 던지고 있지만 어쩌면 다음 차례는 당신일지도 모른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