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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문화대혁명, 그땐 애국인 줄 알았는데…심대한 오류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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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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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로 중국 문화대혁명(문혁) 50주년을 맞는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문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5·16 통지문을 채택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문혁을 논하는 건 중국에서 금기다. 공산당의 오점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문혁을 태동시킨 이상주의와 문혁 이후의 중국을 지배한 실용주의 노선의 적절한 융합점을 찾아내지 못한 게 원인이다. 본지는 당시 홍위병과 상산하향(上山下鄕)이란 이름의 하방(下放)을 경험한 중국 남성 싱페이언(邢培恩·66·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문혁 50주년을 되짚어 보았다.

문혁 당시 나이는.
“톈진(天津) 제18중학 3학년이었다. 그로부터 3년간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신입생 모집이 중단됐다. 그 바람에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66∼68년 졸업생을 라오산제(老三屆)라 부른다. 대학에 들어가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신 혁명조직에 들어가 홍위병이 됐다.”
어떤 활동을 했나.
“매일같이 군중 집회에 나가는 게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텐진 당서기를 끌고 나와 ‘피더우’(批斗·비판투쟁)를 했다. 그는 하루 이틀 뒤 숨졌다. 홍위병 중에는 선생님이나 부모까지 비판대에 세우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은 걸 지금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친구 중에 선생님을 가혹하게 때리고 모욕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일로 마음 고생을 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8월 18일 수십만 명의 홍위병이 중국 전역에서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마오 주석이 망루 위에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멀어 아주 작게 보였지만 황제를 알현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 연설도 안 했지만 광장에는 감격의 함성이 진동했다.”
홍위병이 된 이유는.
“그 때는 마오의 말을 따르는 게 애국인 줄 알았다. 나는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세워진 이듬해에 태어났다. 우리 동갑내기들은 ‘공화국의 장남’이란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때까지 나라가 하는 일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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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8월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첫 홍위병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사회에서 자본주의 추종 세력을 몰아낼 것을 다짐했다.(작은 사진) 망루 위에서 내려다보 는 마오쩌둥 과 린뱌오 , 저우언라이 (오른쪽부터). [중앙포토]

홍위병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은 정당하다)’ ‘대란대치(大亂大治·천하에 난리가 일어나야 대치가 온다)’는 마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군이 ‘조반’에 개입하면서 중국 대륙 곳곳에서 피를 동반한 ‘대란’이 일어났지만 ‘대치’는 오지 않았다. 2∼3년간 광란을 일으킨 홍위병들은 골칫거리로 변해갔다.

68년 도시의 ‘지청(知靑·지식청년)’을 농촌이나 변방으로 보내 노동을 통해 재교육시킨다는 상산하향 운동이 시작됐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이 먼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변방인 베이다황(北大荒)농장으로 갔고 나도 한 달 뒤 같은 곳으로 갔다. 언제 돌아올 것이란 기약도 없었다. 3남1녀 가운데 장·차남이 모두 가족과 생이별을 했지만 당시로선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인의 장래나 가족의 신상에 정치적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이 숨지고 4인방이 체포된 뒤에도 2년 더 있다 78년에 돌아왔다.”
생활은 어땠나.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극한 생활을 했다고 보면 된다.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가는 게 주 임무였는데 해 뜨기 전에 나가 캄캄해지면 돌아오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기에 마오쩌둥 어록 영문판을 갖고 가 읽고 또 읽었다. 그것 말고는 제대로 된 영어 책이 없었다. 겨울엔 영하 삼십도 밑으로 내려갔고 폐렴에 걸리는 친구도 나타났다. 누구나 벗어나고 싶어 했다. 대원들 가운데 평판이 좋고 자질 있는 사람을 대학에 보내는 ‘공농병(工農兵)학생’ 제도가 생겨났는데 거기 뽑히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인생의 10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아닌가.
“원망도 후회도 없다. 정신적으로 강인해진 면도 있다고 본다. 어떤 고난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게 나도 모르는 사이 생겼다. 하지만 다시 가라면 절대 안 갈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나.
“두말할 나위 없이 심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목적이 뭐였든 결과가 어땠든 그런 방식의 정치투쟁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톈진=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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