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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일본 과거사 뒤집기 방관, 제 발등 찍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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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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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국제정치는 결국 힘의 세계다. 독일의 절절한 과거사 반성은 독일인들이 천사여서가 아니다. 독일의 안보 현실 탓이 크다. 냉전 시절 독일은 지극히 위태로운 나라였다. 서쪽은 서방의 빅3인 미국과 영국·프랑스, 동쪽은 소련 치하의 동구제국에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이나 유대인 학살을 부인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현실적인 독일인들은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해 유럽의 멤버십을 인정받아 경제로 승부하자는 것이었다. 전후 독일이 잿더미를 딛고 유럽 제일의 경제대국이자 문명국가로 올라선 배경이다.

일본, 이대로 두면 전쟁 책임마저 부인할 것
미국 주도 전후 질서 붕괴 음모 집중 부각해야

일본은 다르다. 독일과 똑같은 전범국가지만 지정학적으론 독일만큼 힘든 상황이 아니었다. 이웃 한국은 경제 규모가 20분의 1도 안 되는 약소국이었고, 중국도 죽의 장막을 치고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빠진 삼류 국가에 불과했다. 소련은 유럽에 집중하느라 일본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일본이 독일과 달리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나라가 된 건 이런 환경의 덕(?)을 본 측면이 크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다. 전범재판으로 수뇌부를 처단한 뒤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 진영에 맞서는 보루로 만든 것은 독일·일본에 대해 똑같았다. 하지만 과거사를 놓고는 온도 차를 보였다. 독일에 대해선 나치의 만행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미국 비자를 신청하는 외국인에게 “나치와 연루된 적 있느냐”고 묻는 문항이 몇 년 전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의 전쟁 책임이나 만행에 대해선 이렇게 집요하지 않았다. 하와이 진주만에 제로기의 폭격으로 침몰한 애리조나호 잔해를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은 것 외에 미국 땅에서 일제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시설물은 찾기 어렵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미국의 뿌리가 유럽이다 보니 독일과의 전쟁 기억이 더 강하게 남은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워싱턴 조야를 장악한 유대인 파워 때문이다.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잔혹사를 대대손손 알리려는 이들의 과거사 지키기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의 한 만화책이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며 미국 유대인 단체가 서울로 날아와 수정을 요구하고 미 국무부도 ‘반유대주의’라고 비판했을 정도였다.

유감스럽게도 일본과 관련된 과거사에 대해선 이렇게 강력한 지킴이가 워싱턴에 없다. 아베 신조가 보란 듯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도 미 국무부는 “실망했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간다. 독일 총리가 히틀러 유해가 안치된 성당을 참배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미국에도 태평양전쟁 참전 용사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과거사 수정 시도에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유대계만큼 돈과 힘이 없다 보니 영향력이 약하다. 이에 힘입어 일본은 미국 대통령까지 히로시마에 불러들이며 ‘피해자’ 쇼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진주만 공습도 미국이 유도한 것이며,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자신들에게만 묻는 건 부당하다고 강변하는 수준까지 갈지 모른다.

그럴 경우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 주도로 수립된 전후 질서를 뒤집는 일본의 ‘작업’을 방관하고 심지어 돕기까지 함으로써 동북아의 팍스아메리카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 한국에도 재앙이다. 일본이 미국의 묵인 속에 과거사 뒤집기에 성공한다면 우리에겐 더욱 후안무치하게 나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미국 내 양심세력과 손잡고 일본의 과거사 뒤집기가 미국에 미칠 악영향을 워싱턴 조야에 알려야 한다. 위안부 문제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처럼 한·일 간의 문제만을 거론하면 미국의 적극적 대응을 끌어내기 힘들다. 사람은 자기 이해가 걸린 일에 먼저 움직이는 법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태평양전쟁 책임 회피 같은, 미국과 직결된 과거사 현안들을 일본이 뒤집으려 하는 현실을 집중적으로 부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에 앞서 미국의 국익을 정면 침해하는 것임을 일깨워 미국이 일본의 망동에 직접 제동을 걸게 이끌어야 한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