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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2) 제82화 출판의 길40년(55)|「을유문화사」의 출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을유문화사 이야기로 다시 말머리를 돌려보기로 한다.
45년 12월1일 마침내 을유문화사는 YMCA 건너편 종로 2가82번지 영보빌딩 4층에 15평 정도의 방 하나를 얻어 간판을 건물 앞에 불였다. 무엇보다도 을유문화사의 창업은 건국사업의 일환이란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일제에 말살된 우리 문화. 역사, 우리 문자, 우리말을 다시 찾아 소생시킨다는 거창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어느 날, 위당 정인보선생이 내게 『출판은 새나라 교육·문화발전의 초석이 되는 건국사업이지』하던 말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된 것이다.
신생대한민국의 건국사업에는 여러 길이 있겠지만 우리 글과 우리 말을 찾은 그 마당에 어문의 소생과 중흥으로 민족문화를 꽃피우는데 일조가 될 출판사업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숭고한 건국사업이라는 자각이 내게서 샘솟기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본래 을유문화사의 첫 발의자는 청사 조풍연 형이었다. 그는 소규모의 출판사업을 일으켜 볼 작정으로 사업자금 문제로 민병도씨를 만나러 갔던 길에 동업하기로 허락을 받고 청사에 의해서 윤석중씨가, 그리고 민·조씨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4인체제로 민족문화의 재건과 발전을 사시로 발족되었다.
을유 창설 얼마 후 윤석중 형의 제의가 있었다. 그는 아동물 출판과 어린이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나는 아동물 출판에 힘쓰려 하니 우선 조선아동문화협회를 설치하고 그것을 주로 맡아서 하면 좋겠다』하여 우리는 의논 끝에「아협」발족을 서둘러 나갔다.
을유의 심벌 마크로 말하면, 당시 홍우백 화백의 고안인데「을」자가 교차되면서 「문」 자와 「만」자도 들어 있어 궁궁을을로, 자휙이 서로 이어져 만대의 문풍이 도도히 흐른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었다
을유문화사의 출판 지향은 차차 4가지 원칙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1.원고를 엄선하여 민족 문화 향상에 기여한다.
2.교정을 엄밀히 하여
3.제품을 지성으로 하여 독자의 애호를 받는다.
4.가격을 저렴히 하여 독자에게 봉사한다.
을유문화사는 창립 이듬해 2월 1일 만2개월만에 처녀출판이 나왔는데 그것이 이각경이 쓴 『가정글씨체법』제목의 책으로 표지에「서울 을유문화사 만듦」이라고 한글로 명기하고 있다. 저자 이여사는 서예가 갈물 이철경씨의 언니되는 분이다. 이 「글씨체 본의 값은 4원이었는데, 하도 잘 팔리니까 이미 이때 광주에서 해적판이 나돌기도 했었다.
2월에 계속하여 이각경 『어린이 글씨체험』과 윤석중편, 홍우백 『어린이 한글책』도 나왔다. 이 『어린이 한글책』은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하여 낱말과 관계되는 그림을 곁들인 교본인데, 당시로서는 호화판으로 값도 다른 어린이책에 비하여 4, 5배나 되였다. 그러나 초판 5만부가 당장에 매진되어 재판 2만부를 찍게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2월에 3종의 책을 간행한뒤 4월에는 「아협」이름으로 벽도 (항상 벽에 붙여놓고 볼수 있는 그림과 글이 갈이 된 족자 같은 것)제1집 『우리 지도』, 제2집 『우리 한글』 이 나왔다. 이런 출판은 모두 우리말, 우리글을 익히기 위한 것 이였다.
여기서 홍우백 화백을 말하면, 그는 서울 제2고보 (경복고등학교 전신) 제1회 출신으로 재학 당시부터 그림을 특별히 잘 그린 것으로 소문난 분이다.
그리고 그 해 5월1일 이만규 지음, 이각경 씀 『새시대 가정 여성훈』도 냈다. 뒤에 을유에서 『조선교육사』를 낸 이만규와 그의 영애 이각경 부녀의 공저로 출판되어 주목받았다.
그해 5월30일 『지용시선』간행을 필두로 잇달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합동시집 『청록집』과 신응식의 『석초시집』이 6월에 나옴으로써 시문학의 새 지평을 연쾌거였던성 싶다. 이중 3판에 이른 책은 『청록집』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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