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예측 못해 혼란 커지는 통신업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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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18면

일러스트 강일구

160일. SK브로드밴드(SK텔레콤의 자회사)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심사를 벌여온 기간이다. 지난해 12월 1일 SK텔레콤이 케이블TV 업체인 CJ헬로비전을 인수하겠다며 공정위에 승인을 요청한 이래 당사자인 SK텔레콤은 물론, 방송통신업계 이목은 공정위의 입에 쏠려 있다. 지금까지 공정위가 통신 업체간 합병을 놓고 가장 오래 검토한 것은 SK텔레콤-신세기통신 케이스다. 1999년 12월23일 심사를 시작해 125일 만인 2000년 4월 26일 조건부 승인 결정을 내렸다.


현행법상 기업인수 합병 심사 기한은 최대 120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자료 보정과 추가 자료 요청에 걸리는 시간은 심사 기한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사실상 정해진 기한은 없다. 드물지만 1년을 넘긴 경우(에실로아메라인베스트먼트의 대명광학 인수)나 7개월이 걸린 경우(롯데쇼핑의 CS유통 인수)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통상 120일 언저리에서 결정이 나기 때문에 기업들은 이에 맞춰 계획을 세운다. 특히 올 3월 22일 정재찬 공정위원장이 “경쟁 제한성 검토를 어느 정도 마무리해 조만간 심사보고서가 나갈 것”이라고 밝혀 업계에서는 지난달 공정위 전원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측했다.


‘SKB+헬로비전’이면 KT와 어깨 나란히심사보고서 발송 지연 이유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그동안 이동통신 3사의 신경전에 드라마 제작 등 콘텐트 시장에서 SK의 독주와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지상파 방송사까지 가세하면서 전선이 확대됐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방송통신 지형을 크게 흔드는 이 사안은 (정부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 20대 국회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 선중규 기업결합과장은 “기업결합 심사는 심사기간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 없고, 언제 결론 내린다는 것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지연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정대로 진행하고 있으며 충분한 심사 뒤 발표 전까지는 경과나 일정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덧붙였다. 합병 당사자 서류제출 일정이나 심사 계획을 홈페이지에 공시하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나 미법무부 산하 독점금지국(DoJ), 영국 경쟁시장청(CMA)과 달리 한국 공정위는 심사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NCND)’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합병을 공식 승인하려면 발표 전 해당 업체에 공정위 사무처가 심사보고서를 보낸다. 보고서 발송 이후 3주 이내에 매주 수요일 개최되는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린다. 다시 말해, 5월 중 사무처가 보고서를 SK와 CJ헬로비전으로 보낸다고 해도 전원회의는 6월 중순에나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공정위가 경쟁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결정해도 이 건은 방송통신위원회의 사전 동의 절차와 미래창조과학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공정위 심사 일정이 길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4월 1일을 합병법인 출범일로 잡고 사업 계획을 추진해 온 SK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이동통신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SKT는 지난해 11월 케이블 방송 1위 업체인 CJ헬로비전를 인수한다고 발표할 때만 해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SKT는 CJ오쇼핑으로부터 가입자 415만 가구의 CJ헬로비전을 5000억원에 인수했다.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가입가구 335만)와 합병하면 시장점유율이 26%로 뛰어 올라 단숨에 유료방송사업자(SO) 1위(29.3%)인 KT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동시에 헬로비전의 알뜰폰 1위 사업자 CJ헬로모바일(가입자 85만3000명)도 수중에 들어와 이통시장 점유율도 50%를 넘기게 된다.


시장 판도 뒤흔들 빅딜, 영향 가늠키 어려워SKT는 앞으로 5년간 콘텐트에 5조원을 투자해 경제 활성화에 일조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합병의 당위성을 강조해왔다. 인수대상 기업인 CJ헬로비전, 인수를 해야할 SK브로드밴드는 계획이 틀어지면서 아예 일손을 놓고 있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직원들 사이에선 “이젠 되든 안되든 결정이라도 빨리 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SK의 한 고위 관계자는 “잘해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관계사 전체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불확실성인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KT와 LG유플러스는 지난해 12월 이후 “합병을 승인하면 방송 통신시장 전반에 대한 SK텔레콤의 지배력을 키우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1위 이동통신사와 1위 케이블 업체의 합병은 세계에서도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동통신·유료방송·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 모두 3위를 하고 있는 LG유플러스는 더욱 다급하다. 회사 관계자는 “KT는 초고속인터넷과 유료방송 1위 사업자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인수합병이 성사되면) 우리는 더욱 격차가 벌어진 상대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며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KT와 LG유플러스는 “시장 영향을 더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CMA는 영국 최대 통신사업자인 BT와 이동통신사 EE의 인수를 11개월간 심사를 거쳐 승인했고, 미국 FFC는 미국 최대 케이블업체 컴캐스트와 타임워너케이블의 합병을 14개월 심사 뒤 불허한 사례를 들었다. SK텔레콤이 CJ헬로비전을 인수하면 결합상품을 통해 휴대전화·초고속인터넷·유료방송에서 지배력을 더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KT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시장을 지배하는 사업자가 출현할 경우 요금 인상으로 결국 국민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SKT는 독일 이통사 보다폰(2위)이 케이블 방송 카벨도이칠란드를 인수해 1위 업체 도이치텔레콤을 추격하는 사례를 들면서 “동종업체 인수합병에선 당연히 경쟁 제한 문제를 고려하고, 이에 따라 불허하는 경우가 있지만 통신·방송 등 이종 업체간의 결합은 승인하는 것이 대세”라고 반박했다. 2010년 이후 전세계에서 있었던 22건의 인수합병 사례에서 4건(통신-통신 3건, 케이블-케이블 1건)을 제외하고 통신-방송간 합병 14건은 모두 승인됐다는 것이다. 4건은 아직 심사중이다. SK 관계자는 “통신·미디어 사업자가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창출하지 않으면 계속 내리막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공정위는 이같은 의견 대립에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합병이 통신은 물론 케이블TV·인터넷TV(IPTV) 등 유료방송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을 법한 ‘빅딜’이지만 과연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정해야 하는 공정위의 고민이 길어지는 이유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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