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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찬 논에 비친 풍광, 거울이 따로 없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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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2면

일년 내내 다양한 눈이 날린다. 봄꽃 눈이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즈음에는 꽃가루 눈발이 무성하다.

윗마을에서 양봉 농가의 분주한 벌들을 발견했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아까시나무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아직 온 산을 덮지는 않았지만, 계절은 빠르게 여름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일제강점기 들여와 잘못된 오해로 푸대접을 많이 받았던 아까시나무는 알고 보면 황무지를 정화하는 고마운 나무로 국내 꿀 총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밀원식물이다. ‘과수원길’이라는 노래 덕분인지 ‘아카시아’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 ‘아카시아’는 열대 지역의 상록수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식물원이나 온실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니 혼동하지 말자.

요즘 농기구는 디자인도 예쁘다. 비료 살포를 하는 농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구에 내려온 우주인 같아 웃음이 나오고 자꾸 돌아보게 된다.

쌀농사와는 쌀알 한 톨만큼의 관련도 없지만 오며가며 보이는 게 논이다 보니 논농사의 현황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겨우내 휑하던 너른 논바닥이 갈아엎어지나 싶더니 며칠 전부터 일부 논에는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물이 채워진 논이 이렇게나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예로부터 좀 산다는 집 마당에는 으레 연못 하나쯤 파 놓게 마련인데,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돌확이라는 큼지막한 돌수조를 갖다 놓고 물을 채워 연못 기분을 내기도 했다. 비록 물 그릇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찰랑찰랑 돌 그릇 가득 채운 물 위로 비친 세상은 더없이 감미로울 따름이니 나름 꽤나 효율적인 장치가 아닌가 싶다. 선인들이 그렇게라도 만나려 했던 물빛을 요즘은 집 밖에만 나가면 맘껏 누릴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호사스러운 봄인가.


온 가족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는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뚝방길을 달렸다. 뒷자리 아이들이 소리쳤다. “꼭 물 위를 흘러가는 배 같아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논길 사이를 거닐었다. 모내기를 하기 전 물이 채워진 논은 밤하늘을 담은 티끌 하나 없는 캔버스 같았다. 그건 올려다보는 밤하늘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여린 밤바람이 수면을 흔들었다. 식구들이 앞서가는 동안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한없이 가냘프게 흔들리는 거대한 어둠. 밤바다가 내 곁에 있었다. 잠시 후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기울어 가는 달 두 개가 걸음에 맞춰 우리를 따르고 있었다.


이장희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의 저자. 오랫동안 동경해 온 전원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과 파주를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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