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위암 걸린 공교육 소화제론 안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노무현 정권도 예외 없이 사교육 잡기에 나섰다.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교육비 대책을 단골 메뉴로 들고 나오는가? 사교육비가 그만큼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상당수가 수입의 반절 혹은 3분의 1을 사교육비에 지출하고 있다. 과외비를 벌기 위해 파출부를 하거나, 심지어 노래방 도우미를 하는 엄마들도 있다고 한다. 허리가 휘다 못해 부러질 지경이다. 어느 정부가 이러한 국민의 극심한 고통과 눈물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도 과외비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사교육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학교가 학원에 안방을 내주고 골방살이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

학교교실과 설비를 아예 학원 등에 임대해 주고 좀더 저렴한 비용으로 학교에서 학원 강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상까지도 사교육비 대책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공교육 체제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무시험 진학과 평준화로 지적인 능력.적성.흥미, 그리고 장래 희망이 서로 다른 학생들이 한 교실에 앉아 공부하게 된다.

똑같이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수학실력이 초등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이나 대학 수준의 문제도 거뜬히 푸는 학생이 똑같은 교과서로 수업을 받는다.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는 잠을 자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사들보다 걸핏하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무리 농땡이를 부려도 누구 하나 간섭하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이 같은 공교육 체제의 부실은 그대로 놓아두고 사교육비 감면 방안에만 주력하는 것은 위암 때문에 배가 아픈 사람에게 계속 소화제만 먹이는 꼴이다.

사교육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공교육 체제를 수술해야만 한다. 중.고등학교 생활만 충실히 하면 각자의 능력.적성.흥미.장래 희망 등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양한 형태의 중.고등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건전한 사립학교를 선별해 자율권을 주고 특색 있는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이 일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또 교원의 양성.임용.승진 제도의 개선과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높여나가는 일 등을 포함해 여러 교육정책들을 치밀하게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요리.목공.기계 등의 기술 분야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 못지 않게 돈도 벌 수 있고, 사회적으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교원단체와 학부모들로부터도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현행 학교체제를 고수한다면 학교가 앓고 있는 중병은 깊어질 것이고, 학교뿐 아니라 결국 나라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다른 나라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기업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교육현실을 신랄히 비판하고 획기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지식기반사회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가 학교교육의 근본적인 틀을 바꾸고 학교체제를 다양화함과 동시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싱가포르.중국.일본도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경쟁국가들 가운데 유독 우리만이 평준화와 평등교육이라는 틀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는 더 이상 위암에 걸려 있는 학교에 소화제만 먹이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고, 과감히 칼을 빼어 공교육체제의 부실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 시기는 이를수록 좋다.

정진곤 한양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