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정연주 선배께 드리는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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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사장 귀하

우선 뒤늦게나마 KBS 사장에 재신임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딱딱한 '사장' 대신 친근한 '선배'로 부르겠습니다. 정선배께선 저를 잘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저는 보도를 통해 정선배의 동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달 전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두 차례 합쳐 8년간의 근무였지요. 무엇보다 애들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교육문제로 이른바 '기러기 아빠'가 늘고 있는 마당에 그곳에 두고 오지 그랬느냐는 거였습니다. 인생의 절반과 60%쯤을 독일에서 보낸 두 아이는 귀국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특히 딸아이는 귀국을 앞두고 매일 울더군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설득이 힘들었지요.

그러나 저는 결국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남들이 뭐라든 전 제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 때문에 고생한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정선배의 의견을 존중은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정선배를 처음이자 마지막 뵌 게 벌써 9년 전이군요. 세월 참 빠릅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던 1994년 여름 제네바에서였지요. 북한과 미국이 북핵 문제를 일괄타결한다고 해 저는 베를린에서, 정선배는 워싱턴에서 각각 날아 왔습니다. 당시 영어가 능통했던 정선배는 갈루치와의 면담 등 미묘한 이슈들을 후배들에게 통역해 주시는 자상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히 회담장이던 북한 대사관저 앞에서 대기하며 취재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저희 후배들이 서울에서 유행했던 농담 시리즈를 들려 드리자 매우 좋아 하셨죠. 미국 생활을 오래 하신 탓인지 당시로서도 이미 한물 간 '개구리 시리즈'나 '전통(全統)시리즈'에 포복절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번에 다시 베를린에 근무하면서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주요 신문사가 일부에 의해 '조폭적 언론'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엔 '누가 이런 양아치적 발언을 하나'하고 놀랐지요. 이 말을 처음 쓰신 분이 정선배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9년 전 그 순진해 보이던 정선배의 웃음과 '조폭언론'운운하며 침을 튀기시는 모습은 아직도 연결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의 한(恨)이 무섭긴 무섭구나'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난주 첫 방송된 KBS-2TV의 '시민프로젝트, 나와 주세요'란 프로를 봤습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저는 한마디로 全씨의 인격에 대한 부관참시(剖棺斬屍)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무슨 한풀이 굿판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법이 못하니까 우리가 나선다'는 투의 발언에선 솔직히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의 망령도 어른거리는 듯합디다.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국가도 결국은 다 법과 원칙대로 하자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가 미워도 이건 아니지요.

그래서 딱 한 가지만 부탁 드리겠습니다. 기왕 공영방송의 수장이 되셨으니 확실하게 개혁해 주십시오. 이미 독자들로부터 좋은 신문이라고 평가받는 신문들을 비판하기보다 아직 공영방송으로서 미흡한 점이 적지 않은 KBS를 개혁하는 데 진력해 주십시오. "신문의 영향력은 방송에 못미친다"고 말한 분이 누구입니까.

그 '영향력 없는' 조중동을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라고 비난하시기 전에 '통제는 물론 경쟁도 없어 무소불위'라는 비판을 듣는 KBS를 개혁하십시오. 개혁의 요체는 두말할 것 없이 KBS를 정치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손으로 돌려주는 일입니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고, 그래서 파워가 막강하실 정선배야말로 역설적으로 이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유재식 문화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