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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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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흑인의 평등이라고! 허튼소리! 우주를 지으시고 그것을 지배하는 위대한 신의 통치하에서 언제까지 무뢰한들이 이 따위 저속한 선동을 계속 외쳐대고, 천치들이 괴상한 주장을 떠들어댈 것인가."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1859년에 종이 조각에 남긴 글이다. 링컨이 흑인들에게 자유를 줄 때 그의 머리 속에 결코 생물학적 평등까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지질학과 동물학 교수를 지냈던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김동광 옮김,사회평론)는 근.현대사에 다양한 탈을 쓰고 나타났던 생물학적 결정론의 허점을 조목 조목 들추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란 인종과 계급, 성별에 나타나는 행동규범이나 사회적 경제적 차이는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서문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인간이라는 잘못된 척도'(이 책의 원제는 'The Mismeasure of Man'임)라는 제목은 이중 해석을 의도한 것이지 아무 생각없이 성차별의 흔적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이 제목은 프로타고라스가 인류에 대해 남긴 유명한 격언을 패러디한 것이며, 남성을 인간의 기준으로 간주해 여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잘못된 척도로 삼았던 경향이 보여준 진정한 의미의 성차별주의를 지적한 것이다."

19세기 이후로 남성이 여성을, 백인이 아시아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과학적'근거로 동원했던 학설들이 많이 등장한다. 두개골의 용량을 지적 수준과 연결시켰던 골상학, IQ, 그리고 1995년에 격론을 일으켰던 리처드 헤른슈타인과 찰스 머리 하버드대학(심리학)교수의 '종형곡선(Bell Curve)이론'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종형곡선이론은 지능지수가 90~110인 중간 계층이 가장 많지만 75 미만인 저능인구도 많아 그 분포도가 종(鐘)모양을 이룬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저능한 인구 대부분이 흑인이며, 낮은 지능은 유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려 해봐야 소용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IQ 1백 이하의 사람이 스스로 단종(斷種)을 하면 보상금을 주자는 쇼클리의 제안, 공격적인 남자에게는 Y 염색체가 하나 더 있다는 학설, 타고난 유전적 소질에 따라 결혼 유무와 가족의 크기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 나치 독일이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키울 즈음 미국은 우생학을 근거로 이민을 제한했다는 사실 등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긴 역사이다.

골상학과 관련된 대목. 대체로 육식동물의 뇌는 초식동물보다 크다. 그 차이는 지능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육식동물의 경우 죽고 사느냐가 걸린 상황에 자주 처하기 때문에 정보를 더 신속하게 더 많이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굴드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종(種)을 달리 하는 동물 사이에 보이는 그 차이가 종(種) 안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구체적으로 뇌가 작으면서도 천재적 활동을 편 인물이 수두룩했다.

사후에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유명인 중에서 뇌의 무게가 처음으로 2천g을 넘었던 사람은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였다. 그러나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은 1천2백82g의 뇌로도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미 있는 것은 골상학의 창시자인 프란츠 조지프 갈이 1천1백98g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굴드는 IQ로 넘어간다. 프랑스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가 IQ 테스트를 고안했을 때만해도 그것은 학습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아이들을 찾아내 특별한 관심을 쏟기 위해서였다.

그런 고귀한 뜻은 무엇이든 숫자로 바꾸고 순위를 매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속성에 묻혀버리고 IQ 테스트가 제도화되었다. 또 높은 수치에 보상이 따름에 따라 인간의 극히 작은 부분을 말하는 IQ 테스트가 결국에는 부와 권력의 세습을 낳는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6백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휴가기간에 이 책 한 권만이라도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오해'를 털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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