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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애끓는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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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혁진
장혁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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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진
사회부문 기자

지난 2011년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정부가 인정한 것만 146명이다. 이 중 70%(103명)가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제조·판매한 ‘옥시싹싹 NEW가습기당번’을 사용했다가 숨졌다. 옥시는 제조업체 중 최대 가해자인 셈이다. 이 회사의 인사담당 상무가 19일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수사 착수 이후 2개월 만의 첫 소환자다. 이날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 시위에 나선 안성우(39·무직)씨는 “(검찰 조사를 받는) 옥시 측 임원이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자리를 지켰다가 꼭 물어볼 겁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힘드냐고…”라고 말했다. 그는 옥시 측이 제조한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가 2011년 부인과 둘째 딸을 잃었다.

비극의 희생자는 안씨뿐만이 아니다. 수백 명의 유가족들은 소중한 이를 가슴에 묻고 5년을 간신히 버텨 왔다. 목에 구멍을 뚫고 인공호흡기로 숨을 쉬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지난 18일 관련 업체 중 최초로 롯데마트가 사과문과 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홈플러스도 보상 발표를 계획 중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불신은 여전히 깊다. 이날 밤늦게 피해자 모임 카페엔 “사과의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내용의 글들이 올라왔다. 본격적인 검찰 수사를 앞두고 한 ‘면피성 사과’라는 것이다. 옥시의 제품을 썼다가 23개월 된 아들을 잃었다는 부은정(44·여)씨는 “검찰에 사과를 한 건지,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한 뒤 "너무 늦은 사과 아니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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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9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인 안성우씨가 1인 시위를 벌였다. [사진 장혁진 기자]

피해자들은 검찰이 제대로 된 진실 규명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현재 수사의 초점은 옥시에 맞춰져 있다. 검찰은 그동안 여러 차례 압수수색을 통해 옥시가 사건을 조작·은폐하려 한 단서들을 포착했다. 옥시가 대학 교수에게 뒷돈을 주고 유해성 실험 결과를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려 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자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피해자들의 부작용 호소 글을 무더기로 삭제한 의혹도 받는다. 2011년 12월 기존 법인을 청산하고 새 법인을 설립한 것 역시 책임회피용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14년 1월에는 사명을 RB코리아로 바꿨다. 그럼에도 옥시는 “공식 입장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국 본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봤다. 현지시간 오전 9시 정각임에도 본사 홍보팀장은 “회의 중”이라며 한국법인 담당 직원을 연결해 주지 않았다. 그의 e메일 주소를 받아 메일을 보냈지만 역시나 답이 없었다.

반성 없는 제조업체들의 행태에 피해자들은 지쳐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기업들이 “진실을 밝히라”는 피끓는 호소에 응답하길 기대한다.

글, 사진=장혁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