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0>제 82화 출판의 길 40년(23)대동 출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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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37년쯤으로 추정된다. 견지동 111번지 현 서울 농협 공제회가 들어 있는 건물에 대동출판사는 문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벽돌집 2층 건물이었다. 사주는 그 당시 금광으로 크게 성공한 이종만. 울산사람으로, 인품이 온화한 사업가였다. 그는 대동 광업 주식 회사 사장으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대동공업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이훈구 박사를 교장으로 앉히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던 이 였다.
사주의 이같은 온화한 인품주위로 중역진과 그밖의 여러 부서에는 당시 민족주의자로 존경 받던 인사들이 모여 든다. 이준열 정현모 이성환 이관구 허헌 이원조 황의돈 홍기무 박노갑 들이 그들이었다.
나는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관심있는 독자 여러 사람들ㄹ부터 일제말에 활약했던 대동출판사에 관하여 남길만한 것들이 있을 것인데, 이를 좀 읽도록 해달라는 ㅇ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월노 언론인이자 현 세종대황기념사업회 회장인 성재 이관구 선생을 찾아뵈었다.
『이종만 사장 그분은 점잖았었어요. 금광해서 번 돈으로 출판사를 차려 문화사업을 해 보겠다는 거였지요.
나는 1936년 일장기 말소 사전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생계마저 어렵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때 친구들의 권유로 대동출판사에 들어가게 됐지요. 나는 거기서 「광업 조선」과 「농업조선」 등 두 월간지의 주간겸 상무직으로 일했는데 이런 일을 하는 한옆으로, 「대동문고」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고문헌 전적자료를 수집하는 사업에 착수했어요. 그런데 이 사업에 대해서만은 이 사장도 이해가 부족하여 돈 타내는데 무척 힘들었지요.』
성재 선생은 노안에 자못 상기한 표정으로 당시의 일을 회상하여 말을 이었다.
『나는 고대의 역사문화 관계의 문헌수집을 토대로 하여 국학연구 기관의 설립을 발의했자요. 하여 고전적을 수집할 욕심으로 시가보다 비싸게 사들인다고 소문이 펴졌는데, 그러니까 아침마다 책꾸러미를 든 행상들이 밀려들어 출판사 앞은 마치 고본 시장이 선듯했어요.』
그런데 호사에는 다마라! 그즈음 관훈동의 김항당(현 통문관의 이겸노씨 경영)과 당주동의 유길 서점(신재영씨 경영)에 조선 총독부로부터 폐기처분된 고문서 가운데 「비」자가 찍힌 서류 뭉치가 흘러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성재는 즉시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 비문서는 선열들의 독립 운동과 사상 운동에 관한 중요 기록이었다. 표지가 따로 없이 전철된 등사물 서류였는데, 그는 전기 두 서점으로부터 이들 문서 50여권을 사들였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소문은 퍼져 총독부 당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용산서 고등계 주임 앞으로 끌려갔어요. 그들은 나를 스파이로 몰아요. 그 서류를 내게 팔았던 신재영·이겸노도 연행되었고 나를 도왔다고 홍기무도 체포되었지요. 고문은 가혹했어요. 의자를 치켜들게 하고는 무릎을 사정없이 때렸어요. 나는 백일 이상 고생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 3주 동안 고생했지요.』
성재 선생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면서도 무엇보다 분하고 한스러운 것은 그 귀중한 문서를 잃은 일이라고 몇 번씩이나 거듭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 후 「대동 문고」수천 권의 고전적은 박흥식씨가 운영하는 재단으로 인계되었다는데 그 후의 일이 궁금하다고 했으며, 촉탁으로 황의돈씨를 채용하여 철저하게 감정했고 출장비를 써 가며 전국에서 수집해 들인 권위 있는 이 문고가 지금은 아마도 산일되었을 것이라면서 퍽이나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이상 대동 출판사의 내력을 적으며 생각하니, 당시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에는 올해로 88세가 되신 성재선생 한 분이 생존해 계셔 이 기록이나마 남기게 되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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