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있게 돈 쓰는 부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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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30면

돈을 좋은 데 쓰기 위해서도 철학과 목적이 필요하다. 기증하는 돈의 액수가 적은 경우엔 어떤 용도로 돈을 쓸 것인가하는 결정을 남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증하는 액수가 커질수록 그 용도를 구체적으로 지명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부호들은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들의 소신과 뜻을 따라 돈이 사용되도록 한다.


자신의 돈을 남에게 기증하면서 특별한 용도를 요구하지 않고 그 돈의 사용 방법에 대해 남을 믿고 일임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이스라엘의 종교 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 종교 제도는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의도와 믿음을 예수님은 인정했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종교단체에 기부하는 돈은 특별한 용도를 요구하지 않고 그 단체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만큼 기부금을 수령하는 단체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가 큰 것이다.


동시에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돈을 기부하는 문화도 발전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재력가에 대한 불신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야 된다는 맹목적인 사상이 팽배한 듯하다. 사회 환원이 그저 자기가 소유하던 돈을 사회에 돌려준다는 뜻이라면 그 돈을 써버리든, 건물 옥상에서 뿌리든, 자선단체에 기부하든, 남에게 준다는 뜻에서는 같은 것이다.


돈을 쥐고 있지만 않다면 그 돈으로 쇼핑을 하든, 남에게 주든 궁극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유주가 자기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남에게 준다는 점을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의무적으로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 중에 그런 사람을 종종 본다.


돈을 기부하는 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돈을 사용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애굽의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곳간에 저장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그 곡식은 흉년이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요셉이 풍년기에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대비한 것은 분명한 목적과 방법을 수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철학은 자선단체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된다. 21세기에 국가는 가장 규모가 큰 자선단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국가가 재정을 집행하는 데에는 상당한 지혜와 철학이 필요하다. 누가 달라는 대로 줄 수 없다. 지혜로운 계획과 절제가 필요하다. 국가도 수입을 늘리는 법을 배워야 되고 자선단체도 수입을 늘리고 보존하는 법을 배워야 된다.


나는 목사로서 세상의 부를 탐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지만 내가 부러운 부자는 자신의 확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돈을 쓸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어디에 쓰고자 하는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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