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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미얀마의 봄과 아웅산 수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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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3월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서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 해 총선거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에게 승리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총재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문민정부이다.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할 아웅산 수지(1945-)는 대통령 직을 자신의 심복 틴초(1946-)에게 맡기고 자신은 외상 교육상 등 4개의 장관을 겸직하였다.

1962년 네윈(1911-2002) 장군의 군사쿠데타 이후 반세기 이상 미얀마를 통치한 군사정권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산 수지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헌법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외국적의 가족이 있는 인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수지 여사는 이미 영국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남편 마이클 아리스는 1999년 사망하였고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새 헌법에는 총선에 이겼다고 새 대통령이 모든 각료의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 국방 내무(경찰) 등 치안관계의 주요 장관은 군사령관이 직접 임명하고 국회 전체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여 개헌을 거부할 수 있는 규정도 신설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당분간 군과 2인3각(二人三脚)의 정권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미얀마에 봄(민주화)이 왔다고 하지만 꽃샘추위(군의 개입)가 기다리고 있다.
막강한 미얀마 군부는 사실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 아웅산(1915-1947) 장군이 만들었다.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의 영웅적 행동으로 오늘날의 미얀마가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를 방문한 1983년 10월9일, 북한에 의한 ‘랑군(양곤의 옛 이름) 폭탄테러 사건’이 터졌다. 버마를 방문하는 외국원수가 의전상 참배하는 국부 아웅산 장군의 묘소에서였다. 대통령의 도착 이전에 폭탄이 터져 대통령은 안전했지만 미리 도착해 있던 수많은 각료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아웅산은 랑군대학에 다니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힘이 옛날 같지 않음을 알고, 버마가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생각했다.
아웅산은 랑군대학 학생회회장으로 학우들을 끌어 모아 반영(反英)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은 영국 관헌의 추적을 받게 되고 독립을 바라는 학생들은 뿔뿔이 몸을 숨겨야 했다.

아웅산은 국외로 탈출하여 중국의 샤먼(廈門 아모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때 독립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버마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중으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를 중칭(重慶)에 고립시키고 폭격으로 장제스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미 연합군은 ‘버마루트’를 만들어 장제스의 항일전쟁을 지원하였다.
버마루트는 랑군에서 시작하여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쿤밍(昆明)에 이르는 육로 수송로로 연합군은 이 루트를 이용 군수품과 생활 일용품 등 물자를 보내고 있었다.
일본은 버마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버마의 무장 독립군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을 원하는 아랍의 지도자들을 모아 오스만 터키군을 습격하는 영국 정보당국의 게릴라 전략을 참고하였는지 모른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불리는 영국의 정보장교 로렌스(T.E. Lawrence) 소령의 활약상이 일본 육군성에서도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일본 육군성은 정보장교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 1897-1967) 대령을 ‘버마의 로렌스’로 만들기로 하였다. 스즈키 대령은 1940년 6월 샤먼에 피신 중인 아웅산을 포섭 일본으로 데려 가 훈련을 시키고 1941년 2월에는 방콕에 남기관(南機關)이라는 특수정보기관을 설치하였다.
독립심이 강한 젊은 학생들을 반영독립의 명분으로 일본이 점령중인 중국의 하이난도(海南島) 타이완(臺灣) 등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 ‘30인 동지(Thirty Comrades)’로 불리는 반영 학생들이 강력한 군사훈련을 받고 버마로 돌아와 무장 항쟁을 이끌었다.
피터 오툴이 열연하고 데이비드 린이 감독한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Lawrence of Arabia)’에서 감동적으로 보았던 영국의 정보장교 로렌스 소령은 1918년 여름 아랍 독립군 지휘자 파이잘 왕자와 함께 터키군의 주요 거점 도시인 다마스커스 공략에 성공하였다.
‘버마의 로렌스’로 불리던 스즈키 대령도 아웅산 등 ‘30인의 동지’를 주축으로 하는 버마 독립군과 함께 1942년 3월 영국군으로부터 랑군을 탈환하였다.
스즈키 대령은 임무를 완수하자 1942년 6월 도쿄로 전임되고 그 후 소장까지 진급 1945년 2월 퇴역한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스즈키 소장을 BC급 전범으로 체포하여 랑군으로 연행하였다. 아웅산 장군 등 ‘30인 동지’들은 스즈키 소장의 체포에 강력히 항의하여 스즈키 전범은 석방되었다. 1981년 버마 정부는 스즈키 소장에게 국가최고훈장을 수여, ‘버마의 로렌스’로 공식 인정하였다.

1942년 7월 아웅산 장군은 일본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버마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듯 했다. 1944년 인도침공을 앞두고 인도와의 국경근처의 임팔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버마의 독립보다 전쟁물자 조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웅산 장군은 일본의 독립 지원은 거짓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독립은 일본의 괴뢰정권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아웅산 장군은 이번에는 영국의 협력을 얻어 ‘반파시트인민자유연맹’을 만들어 일본군에게 처음으로 무력으로 대항하였다. 1945년 3월 27일로 이날은 버마 국군의 날이다.
1945년 6월 아웅산 장군은 영국군의 지원으로 랑군을 회복하고 대일 승리를 선언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독립의 기쁨에 넘쳤던 버마를 돌연 영국군이 장악한다. 영국은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종전 후 아웅산은 루이스 마운트배튼 버마 지역 연합군 사령관과 애틀리 수상을 만나는 등 버마의 독립을 위해 런던의 지도부를 움직여 독립의 약속을 받아냈다.
1947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한 아웅산은 내각을 구성 독립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어느 날 괴한들이 회의실에 침범 아웅산 등 각료들을 살해하였다.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의 나이 32세 때였다. 버마의 독립을 원하지 않은 영국정부의 음모라는 설이 흘러 나왔다. 아웅산 장군은 죽었지만 다음해 1948년 1월 그의 동료 우누를 수상으로 하는 버마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2년 네윈 장군은 혼란에 빠진 우누 문민정부를 전복하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다. 네윈 장군도 ‘30인 동지’의 일원으로 아웅산 장군의 부하였다.

1988년 8월 8일 아웅산 수지를 중심으로 이른바 ‘8888 항쟁’이 일어나 네윈 장군의 장기 군사독재에 항의한다. 군사정권은 마지못해 직접 선거를 허용하게 되고 1990년의 선거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이 압승을 하지만 군사정권은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 된다.
2010년 군사정권은 민정이양과 함께 군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여당(USDP)을 결성하고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미얀마로 바꾸었다.
국명 ‘버마‘가 버마민족에 대한 구어적(口語的) 호칭인 반면, ‘미얀마’는 문어적(文語的)호칭에 불과하지만 군사정권은 영국 제국주의 잔재인 ‘버마’를 지우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옛 수도 ‘랑군’도 국호 변경과 함께 ‘양곤’으로 바꾸었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나 서방세계에서는 군사독재의 냄새가 짙은 미얀마 대신 오히려 버마라고 부르고 있다.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화가 완성되면 다시 국명이 버마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미얀마의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지 여사 앞에는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반세기가 넘게 미얀마를 지배해 온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부와의 타협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다.
대외적으로는 대형 댐건설 등 미얀마 북부에 적극적 투자로 안다만해(Andaman Sea)로 나오려는 중국과 경제 시찰단을 앞세워 ‘아시아 최후의 프런티어’ 미얀마에 진출하려는 일본이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을 잘 조정해야 한다.

국민소득 1200 불로 아시아의 후진국 미얀마가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인권이 지켜지는 민주국가 건설이 가능할 것인가.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개혁에 세계인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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