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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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려 공민왕 8년 4만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했다. 당시 1세기에 걸친 원나라의 내정간섭에 시달려왔던 고려는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망국의 위기에 놓인다.
상산김씨는 고려 5백년 사직이 위태로왔던 이 시기에 구국의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 인물이 김득배-그는 1차 홍건적의 침입때 서북면도지휘사로서 이방실·안우 등과 함께 서경(평양)을 수복, 공신이 되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2년뒤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안우·이방실등과 함께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서경이 함락되었다. 왕이 복주로 피신하는 치욕적인 패배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세운·이방실·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으로 반격, 서울을 탈환하고 나머지 적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는 개선후 간신 김고의 무고로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정세운·이방실 등 공을 세운 장군들과 함께 참형을 당했다.
〈반역 누명쓰고 참형〉
그의 두 동생 김득제(우왕·삼사우사=상산군)역시 홍건적의 난 때 대장군으로 공민왕의 피난길을 시종했고 서경탈환에 공을 세웠으며 김선치(동지밀직)도 이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오르자 세상사람들이 이들 3형제를「삼원수」라 불렀다.
또 원종때 중랑장 김충은 왜구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 상산김씨는 고려말엽 「무」로써 가문을 일으켰다.
상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김유-고려때 보윤이란 벼슬을 지냈던 인물이다.관향 상산(상주의 옛이름)은 그의 세거지이거나 봉받은 고을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운보와 김신보 형제는 1353년의 왜구의 침입, 1363년의 홍건적의 침입때 각각 공을 세워 운보는 반전의시사에, 신보는 봉순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개국후 이 두 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형 운보는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공신에 서훈되고 중구부사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으나 동생 신보는 영광에 낙향,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불사이군 충절지켜〉
태조때 낭장으로 방원(태종)이 사냥터에 나가 표범의 습격을 받았을 때 화살로 표범을 쏘아죽여 방원을 구출했다는 김덕생(동지중구원사), 세조때 두 차례나 침입한 야인을 무찔러 용맹을 떨치고 병조판서에 올랐던 김사우, 구경·사서에 통달했던 석학 김우생(순천부사)등은 조선초기의 명현들. 이들중 김우생은 성삼문·박팽년 등과 친분이 두터웠고 1457년 단종이 억울하게 숨지자 음독자결한 절신이다.
김귀영은 조선 중기의 거목. 명종때 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8번, 사신으로 중국왕래를 9번, 대제학을 6번지내고 선조 14년 우의정에 올랐던 명신이었다.
상산김씨는 조선중기에 접어들면서 김광준(인종·반형령) 김범(학자) 김홍미(선조·대사간) 김덕겸(동지중구) 김덕성(인조·대사헌·청백리) 김만기(명절제사) 김유(부제학) 김우석(숙종·형조판서) 김연(경종·호조판서) 김동궁(영조·이조판서) 김광세(대사헌) 김광대(학가)등 명현을 배출,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이들 중 인조때 청백리에 뽑혔던 김덕성은은 광해군때 이항복과 함께 발모론을 반대했다가 남해로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6년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부제학·대사성·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시로 명성을 떨쳤던 김덕겸은 그의 형이요, 숙종때 형조판서 김우석은 그의 손자다. 경종때 호조판서 김연은 김우석의 아들. 김연의 조카 김동필은 이조판서로서 영조의 「탕평책」을 도와 당쟁완화에 힘썼다.
조선때 문과급제자는 총55명.
〈발모론 반대로 유배〉
김성숙은 독립운동가로서 사회장을 지냈다. 이당 김은호화백은 한국 근대미술사의 거목이었다. 그는 북종화의 전통을 이어온 마지막 화가라는 점에서 우리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해방후에도 상산김씨는 사회각계에 많은 일꾼들을 냈다.
김영균(의박·서울대의대학장) 김성만(서울지법 부장판사) 김춘호(전국회의원) 김인(전국회의원) 김주호(경남지사) 김창균(대구고법판사)등이 돋보인다. <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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