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아침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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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처음으로 맞는 민속의 날이었다.
아침에 시인 H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였는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거냐고.
안그래도 며칠전부터 근교산절 (산사) 엘 오랜만에 찾아갈 참이었으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산에 눈이 내렸으니 좋았고 동행이 생겼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해서 앞장서게된 일선사행 안내역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바위의 화살표가 눈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나라 10년 남짓한 세월의 간격이 계속 내눈짐작을 빗나가게 했다.
『아니, 내가 일선사 가는길을 모르다니?』
하기야 그래서 심심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고 하필이면 늘 조심스레 피해 다녔던 그 중험한 바위등성이 길을 기어오르느라고 정신이 버쩍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능 초입 오르막길에서 평론가 C부부를 만나 뜻밖의 대접을 받을 때부터 초하룻날 나들이는 신나고 재미로왔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해도 일선사 대웅전 섬돌에 서서 바라다보는 경개가 역시 피크였다. 수없이 되돌아가던 지난날의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비로소 나는 을축년 구정에 기어이 그 절을 찾고싶어했던 자신의 속마음이 지폈다.
절 살림채 지붕 새로 부처살 처럼 퍼져나간 시야는 깊숙한 계곡에서 부터 서울시내에 이르기까지 환히 내려다 보인다. 해가 바짝들어 이웃 능선은 손을 뻗으면 닿을듯 뉘 집 안마당처럼 가까이 다가서며 먼 데는 아득하게 더욱 멀리 내 생각을 빨아 올린다..
70년대 초에 가장 큰 눈이 내린 겨울방학, 기기서 웨일즈의 시인「딜런·토머스」의 책몇권과 씨름하던 일이 떠오르는가 하면 남편에게 코뼈가 휘도록 매를 맞아 저승의 업을 지우느라고 불공을 드리러오던 여신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발을 끊고있는 동안 그녀도 발이 끊겼으며 간간이 걸려오던 전화도 잠잠한지 오래라 한다.
그 뿐인가. 주지스님도 아랫마을로 내려가 선방을 따로 차렸고 그때 보다 훨씬 훤칠해진 안방 가운데 자리에는 그 당시 부전스님 밑에서 일하던 연소했던 스님이 어엿이 앉아계신다.
『공양주 보살도, 부전스님도 떠난지 오랩니다. 그럼요. 많이 편리해졌지요. 전기불도 들어오고 전화도 생겼으니. 그래도 신도는 그때 반도 안됩니다. 오기가 힘들답니다.』
나 들으라고 하는말은 아닐테지만 나는 평창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나라도 자주 와야지. 민속의 날만이 아니라 달마다 날마다 참회하고 비는 마음을 단단히 챙겨야지 했다. 신 동춘<시인·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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