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다운 유세"에 인파도 "사상 최대"|막바지 총선…취재기자 방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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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국적으로 합동연설회가 거의 끝나가고 바야흐로 선거전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합동연설회를 통해 나타난 갖가지 양태를 토대로 중반전을 점검하고 선거전의 막바지 향방을 가늠해봅시다.
-이번 합동유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디를 가나 청중이 폭발적으로 많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시골 면 단위에 가도 1천명이상, 군·읍소재지면 5천∼1만명, 시 단위를 넘어서면 간단히 기만명이 모이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 같이 많은 군중은 여·야 어느 쪽도 일찌기 예상 못한 것이죠. 그래서 후보들에게는 유세전략의 변경이 불가피했고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처럼 정치행사다운 냄새를 맡는 기회가 됐습니다.
-어떤 야당후보는 첫날 많은 청중에 압도돼 그들이 무조건 여당의 동원세력이라고 생각했었대요. 그러다가 몇 마디 말을 하고 반응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쾌재를 불렀다고 실토하더군요.
-서울 종로-중구나 광주의 유세장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작건 크건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근래 운동경기장을 빼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자유당시절 해공·유석의 얘기를 들으러 모인 한강백사장의 군중들, 박정희-윤보선, 박정희-김대중씨 간의 대통령선거전 유세광경이 연상되더군요.
-이 엄청난 변화가 도대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국회의원 선거유세장이 이토록 붐빈 것은 우리 선거사상 처음이 아닌가 해요. 유신이후의 9, 10대와 지난번선거는 물론이고 7, 8대 선거 때도 이렇지는 않았거든요.
-일부 후보들 간에는 서로 상대방이 박수부대를 대거 동원했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만 설득력이 적어요. 특정 후보가 사람을 동원하는데는 조직이나 재력상 몇백명대를 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유세장에서 허전함이나 한심스런 기분에 빠져들지 않을 정도의 마무리는 각 후보가 했겠지요.
그러나 몇천명대를 넘어섰다 하면 일단 자발적 참여군중이 다수라고 봐야합니다. 후보자들이 진실로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유세장으로 불러들였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첫째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갈증을 느꼈던 탓이지요. 11대 선거야 대부분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찍지 않았습니까. 유세다운 유세가 실로 오랜만이라는 얘기죠.
-지난4년간 국민들이 내막을 궁금해하는 사건·사고도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그 동안의 정치가 국민들의 정치수요를 채워주지 못한 게 큰 원인인 것 같아요. 또 뭐랄까, 맺힌 한 같은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정내혁은 왜 안 잡혀갔을까, 소문으로만 듣던 장영자 사건은 과연 어떤 것인가 등등….많은 유언비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금·신당의 등장이 야당끼리의 선명경쟁을 부채질한 것도 관심제고에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요. 그것으로 인해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는 궁금증이 자극되고 뭔가 「시원한 소리」를 해줄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겠죠.
또 4년간 묶여있다 나온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직접 보고 확인해보려는 심리도 작용했을 겁니다. 예컨대 『이민우, 이민우』하는데 그는 과연 누구인가, 광주사태의 또 다른 진상이란 것이 있는 것인가-.
-이번 유세에서 단상발언은 1백%이상 언론자유가 구가된 셈입니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 같은 원색발언의 난무를 언론자유의 구가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 폭발현상으로 보고 자제를 촉구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선관위 당국은 사실상 법 집행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단상의 자유(?)를 수수방관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유세장에 젊은 층이 많이 운집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20, 30대의 젊은 유권자가 전체유권자의 55%를 점하고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지요. 또 최근의 학원사태로 젊은이의 목소리가 높아진데다 우리의 정치현실이 젊은이의 이상론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불만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봐야할 겁니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질 문제가 너무 많이, 너무 오래 갈등의 조화 없이 우리사회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유세장에서 남의 말을 듣고, 대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체험하겠다는 자세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이미 정치의 「정통성」 「도덕성」 등에 자기 류의 확고한 결론을 갖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함성을, 다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야유를 보내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유세장에서 자기확신을 체험하겠다는 심리현상이 폭발한 것 같습니다.
-유세장의 일반적인 흐름이 정부·여당에 대한 불신 쪽으로 치우치고 반대자의 의사표시에 「겁」이 없어진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봐야합니다.
-현상과 주장에 대해 논리적 규명이나 합리적 해명에는 귀를 막고 유언비어의 반복이나 밑도 끝도 없는 슬로건에 흥분하거나 환호하는 것 같은 일부 군중의 태도는 걱정되더군요.
-일부 흥분한 젊은 층이 반대의 주장에 과격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선거제도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도 사회전체가 충고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역할을 양식 있는 나이듬직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맡고 나서야 하는 건데 그럴 생각은 전혀 않고 정부·여당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분위기를 정부·여당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장영자」란 말 한마디에 무조건 공감하고 정부·여당의 해명과 설득은 치지도외하는 풍토도 큰 눈으로 보면 정상은 아니죠.
-지금까지 학생들의 데모유인물에나 나오던 슬로건이 이번 선거를 통해 시민의 곁으로 많이 다가왔는데 이것이 두고두고 끼칠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면역효과도 주었겠지만 항생제의 단위를 높인 데는 대학생의 유세참여와 신민당의 「입」이 상승작용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세장에 나타난 말로만 보면 우리 사회가 혁명 전 단계가 아니냐고 고소를 짓더군요.
-돌이켜보면 11대 국회가 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여과하는 기능을 제대로 못했다는 결론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불과 2주일에 모든 게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은 우리가 뭔가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만 두고 지내온게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거의 모든 야당후보가 경상도에서는 김영삼씨와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는데에 안간힘을 쓰고, 전라도에서는 김대중씨를 사모한다니 말입니다.
-일부 후보가 구속되어봐야 당락에 나쁠 것 없고 이판에 할 소리, 못할 소리 실컷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과연 유권자들이 현명하게 판단해줄지….
-유세를 통한 여러 가지의 급격한 변화에 여당후보들이 융통성 있는 대처를 못하는 것도 우리정치의 수준과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야당의 다양한 공격에 여당은 중앙당의 지시(모범답안) 대로만 대응하더군요. 여당류의 경직성이지요. 어딜 가나 똑같이 맏며느리가 어렵다는 맏며느리론을 펴고 농지세법개정은 모두 자기가 했다고 주장하더군요.
-또 정치적 안정을 강조한 나머지 정종택씨처럼 페이스를 잃고 민정당이 적게 당선되면 국회가 해산된다는 식으로 공개발언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정씨가 너무 솔직했을 뿐이지 여당후보들은 방식은 다르지만 그런 느낌을 저마다 조금씩은 풍기더군요.
-선거를 통해 극명하게 부각되었습니다만 비교우위론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그릇된 농정으로 피해를 본 농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바로 그 농정의 책임자인 박종문 농수산부장관이 민정당 전국구후보라고 공격하는 야당후보에게 박수치는 농민이 많다는 사실을 민정당은 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울산 같은데서 『공산국가에도 「바웬사」가 있는데 우리는 노조도 못 만드냐』고 항변한 야당후보가 노동자로부터 마음속으로부터의 공감을 얻는 것 같습디다.
-인신공격이 여전하고 저질·기괴한 발언과 행동으로 득표하려는 후보가 많은 것은 결국 국민들이 가려내 심판해야 합니다.
-3개 야당간 정체를 시비하고 비방하는 것도 이 시대가 안고있는 정치판의 부스럼이겠죠.
-아뭏든 곧 유세는 끝날테고 이 열풍이 득표에 어떻게 나타날지 계속 지켜봅시다. <정리=전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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