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한나라, 벼랑끝 힘겨루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지난 7일 KBS 신관 로비.'공영방송 말살하는 한나라당 박살내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 10여개가 늘어서 있다.

복도에 비치된 노보(특보) 1면엔 '한나라당 해체투쟁 본격화'란 극단적인 제목도 눈에 띈다. 바로 뒷장엔 'KBS 말살 획책하는 5인방'이란 타이틀로 한나라당 최병렬.하순봉.고흥길.이경재.김정부 의원의 사진과 이력이 적혀 있다.

최근 한나라당과 KBS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어느 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또 밀릴 수 없는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마주 보고 달리는 두 열차=지난 4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김영삼 KBS 노조위원장이 마주 앉았다. 시종일관 가시돋친 말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金위원장은 지난달 19일 한나라당이 내놓은 방송개혁안의 오류를 지적하며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崔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연주 KBS 사장의 '특별한 관계'를 자주 언급했다.

그는 "공영방송답게 해 달라. 일방적으로 공격 프로를 만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날 만남이 전혀 소득이 없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입장 차만은 확실히 확인한 셈이다.

金위원장은 7일 "KBS를 부당하게 건드리는 한나라당 인사들에 대해선 비리 정보를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는 말로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왜 갈등 불거졌나=표면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두 가지다. 우선 2TV의 민영화와 수신료 폐지 등의 방안이 포함된 한나라당의 방송개혁안 발표. KBS는 한나라당이 방송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지난 1일 한나라당이 KBS 결산 승인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시킨 것이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전례가 없는 이 일을 놓고 한나라당과 KBS는 벼랑 끝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들 뒤에는 정연주 사장 체제의 KBS를 바라보는 한나라당의 불편한 심경이 녹아 있다. KBS가 대통령과 지나치게 코드를 맞춰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민감한 현대사를 다루는 프로의 진행을 '노사모'의 주역 문성근씨가 맡고, 정치색 짙은 프로들이 신설되는 등 鄭사장의 '개혁안'에 우려를 금치 못한다"며 "KBS를 견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MBC와 역할 교체?=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 시절 김중배 사장 체제의 MBC와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다. MBC가 친정부 보도를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불만 섞인 주장이었다.

'미디어 비평' 등 金 전사장의 '개혁 프로그램'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에 MBC는 "정치권이 근거 없이 공영방송을 흔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지금의 한나라당-KBS 갈등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방송가에선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가 특정 정당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영성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법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이상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