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3)문화인찾기-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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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간송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사동 중턱에다가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집안사람을 시켜 경영하였다. 고서적을 팔고 사는 가게인데 이곳이 간송이 서화·골동을 사들이는 본거지였다. 거간들은 이곳으로 물건을 가지고 나오고 물건이 들어오면 간송이 달려와 감정하고 흥정하는데, 간송은 하도 많이 물건을 보아왔으므로 감정이 정확해 섣불리 속이지 못하였다. 처음에 사들일 때에는 많이 속았고 위창을 비롯해 구룡산인 김용진, 소전 손재성, 춘곡 고희동에게 감정을 청하는 일이 많았지만 얼마 안가 안목이 생겨 척척 진짜·가짜를 가려냈다고 한다.
이 한남서림의 단골손님에 『조선소설사』를 쓴 국학자 김태준이 있었다. 해방 전에 하루는 김태준이 한남서림에 와 급히 간송을 찾았다. 총독부 관리로 있는 사람이 향리인 안동에 갔다가 우연히 『훈민정음』의 원본을 발견했으니 빨리 손을 써 사오라는 것이었다. 무식한 그 책 주인이 『훈민정음』 의 첫 장을 찢어 불쏘시개를 하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못하게 하고 상경했으니 빨리 가서 입수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집에는 그밖에 『동국정운』『불경언해』 『안림금보』 등이 있어 『훈민정음』이 정본일 것이 틀림없으니 빨리 사람을 보내라고 하였다.
간송은 총독부에서 이것을 알고 사들인다든지 또는 강제압수를 한다든지 하면 큰일이므로 몰래 사람을 보내 달라는 대로 거금 3천원을 주고 사들였다. 큰 집한 채 값이었다. 『훈민정음』은 김태준의 추측대로 진본이었고, 그밖에『동국정운』 『안림금보』등도 사왔는데, 그중 한 두 권은 김태준에게 고맙다고 사례로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들인 『훈민정음』을 총독부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숨겨 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내놓아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 하나 간송이 청자 원숭이 오리연적을 사들인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동경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는 영국사람「존·캐스비」는 고려자기 수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중국과 한국에서 모아들인 문화재를 팔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즉시 동경으로 가서 「캐스비」를 만났다. 간송은 「캐스비」가 가지고있는 한국 문화재를 자기에게 다 팔라고 하였다.
그런데 「캐스비」는 얼른 교섭에 응하지 않고 시일을 짙질 끌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섭을 단념하고 귀국하였다. 이 소식이 일본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전영필의 애국심을 칭찬하게 되자 이것에 놀란 「캐스비」가 급히 서울로 왔다. 당신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한국 문화재는 몽땅 당신에게 팔기로 했으니 사가라고 하고 교섭을 끝내고 갔다.
그 팔겠다는 문화재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지만 간송은 그것을 사기로 결심하고 돈을 만들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던 공주농장을 처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간송의 양어머니는 이것에 반대하였다. 그까짓 골동품을 사기 위해 조상 때부터 누대로 내려오던 땅을 팔면 어쩌느냐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간송은 양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주농장을 처분해 「캐스비」의 문화재를 사왔다.
그 속에 끼어 있는 청자 원숭이오리연적은 국보로 지정되어 지금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신문들은 조국의 문화재를 도로 찾아간 애국자라고 또 한번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마터면 영영 외국으로 흘러나가 잃어버릴 뻔한 문화재를 도로 사들여온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지금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만도 10점이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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