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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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역시 선거란 이래서 좋은것인가보다. 경천위지의 재주를 가졌다는 정치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장미빛 비전들이 카드섹션처럼 펼쳐지고 있다.
깃털처럼 가볍던 국민들의 소리가 갑자기 천근의 무게를 지니게되었다. 또 덤으로 국회의원의 값이 대강 얼마인지 알수 있게 되고 전국구 명단이란걸 보고 한바탕 웃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매관매직이라고 손가락질만 하는 것은 형평을 잃은 처사다.
전후 일본보수정치의 기틀을 잡은 고 요시다(길전무)수상은 돈에 무척 결백하여 수상에 영입될 때도 정지자금마련에 간여치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돈 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정치인들을 좋지 않게 말하곤 했다.
그것이 지나치자 어느 가까운 사람이 충고하길『정치란 어차피 돈이 드는 것이고 당신은 돈많은 사돈댁에서 그냥 갖다쓰면 되는 것이지만 정치인들이 모두 당신같은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뒤부터 요시다수상도 입을 다물었다고한다. 요시다수상의 사돈댁은 일본유수의 광산왕으로 돈걱정은 안해도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룰 아래서의 페어플레이다. 같이 반칙을 했더라도 판이 어지러워지면 강한 쪽이 더 비난을 받는 법이다.
선관위에서 과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한사람의 입후보자가 쓸 수 있는 선거자금은 7천3백만원 정도로 정했다 하는데 그에 비해선 소문난 헌금액이 다소 많은것 같기도 하다. 요즘 땅장사라도 해서 한 5억원쯤 재산을 모은 사람이 한번쯤은 사우나탕을 할까 국회의원을 할까 생각해본다는 말도 있으니 『성경을 읽기위해 촛불 좀 훔치면 어떠랴』는 생각인 것 같다.
얼마전 선수촌 아파트를 분양할 때도 기존 룰을 제쳐놓고 기부금 많이 낸 순서대로 판 선례가 있기는 하다. 돈만 많이 있으면 국회의원도 아파트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렸으니 모양이 안됐다.
돈 많은 사돈을 가진 사람이 많은지 전국구가 비싸게 팔려 그런지 이번 선거는 유례없이 풍성한 선거가 치러지고 있다. 사상 유례없이 공명선거가 몇차례 다짐되었음에도 이러니 공명선거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어린 세대들이 잘못 배울까봐 두려울 지경이다.
메뚜기도 한철이란 말이 있는데 요즘 그런 기분 느끼는 사람 많을 것이다. 여야 할것없이 국민들을 받드는 정성이 지극하다. 국민들은 평소 주눅들어 뒷전으로 비실거리다가 진수성찬을 차린 상좌에 모셔진 격이다.
사실 선거선심이라는게 필요한 것이긴 하다.
선거땐 계층간 지역간 부문간 불균형이 선명히 부각돼 평소 무척 잘한다고 했는데도 실제로는 잘못하고 있었음을 홀연 깨닫게 된다.
능률과 편의로 치닫던 행정독선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다.
정책조명이 넒어져 소외지대에도 신경을 쓰게된다.
선거선심을 통해 정책우선순위나 자원배분이 국민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다.
소위 비교우위론에 밀렸던 농촌이 새삼 떠받들여지고 죽어지내던 계층들도 제법 큰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응달에도 한번 볕들날이 오는 것이다.
평소 무섭기만하던 세무서나 경찰서·은행들이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자상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운상의 밀실에서 소수 엘리트에 의해 주물러지던 정책들이 선거에 의해 통풍이 되고 속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통풍정도가 아니라 틀자체를 무너뜨린다는데 있다. 정책우선순위 조정에 의한 자원배분의 교정정도를 넘어서 할 수 없는 것까지 약속을 해버린다. 벌써 위험할 지경으로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한걸음 물러나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GNP가 갑자기 늘어날리도 없고 오히려 선거때 낭비한 만큼 어떻든 메워야하는데도 선거열기에 휩쓸리다보면 약속하는 사람이나 약속받는 사람이나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제한된 가용자원에서 어느 한쪽에 너무 잘하면 그 주름살은 다른 쪽에 가게되어있다. 모두가 다좋을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GNP가 몇배로 늘어나도 모자랄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요즘 기공식 러시를 이루고있는 그많은 공사만해도 어떻게 뒷감당을 할수 있겠는가. 금년 우리예산은 9·7%밖에 안늘었고 정부가 일을 많이 하려면 세금도 많이 거둬야한다.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끄고보자는 급한 마음이야 짐작이 가지만 한없이 높여놓은 국민기대치는 어떻게 할것인가. 기대치가 클수록 실망과 불만도 큰법이다.
먼 후일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선거만 끝나면 물가와 국제수지 때문에 풀어진 돈을 바짝 죄어야할 형편이다. 내외여건으로 보아 금년 경제는 작년보다 오히려 어려울 전망인데 모두들 반대로 기대하게끔 하는 분위기다. 같이 어렵더라도 들뜬 분위기와 달콤한 기대뒤에 맞으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본래 선거경기란 일과성으로서 뒷맛이 몹시 고약한 것이다.
조비이락격으로 2000년대의 현란한 청사진조차 곁들어나와 국민들의 기대치를 주마가편격으로 높여놓았다.
2000년대 선진경제라는 것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저절로 가닫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단씩 힘들여 올라가야 하는 것인데 올라가는 과정의 고통보다 올라가고 나서의 즐거움이 더 강조되고 있다.
선진경제로 가는 길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듯 고행을 각오해야한다. 편한 급행은 있을수가 없다.
정말 갈길은 멀고 험난한데 선거 때문에 편하고 좋은 맛을 잔뜩들여 놓았으니 그것이 가장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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