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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⑧] 목숨 걸고 전장 누빈 자의 충정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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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598년, 조선의 온 산하를 피로 물들였던 7년 전쟁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안전한 철수 보장을 요구하며 명나라와 강화협상에 나섰다. 산발적인 국지전을 제외한다면 전쟁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조선 조정도 종전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강화’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거센 논란이 벌어진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민생 안정과 전후 복구에 나서야 한다는 측과 일본에게 복수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측이 대립한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전쟁 기간 동안 지휘부를 구성했던 대신들이 주로 전자의 입장에 서고, 한걸음 물러나 있던 신하들은 후자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수상으로서 전시 군수 보급을 책임졌던 유성룡, 직접 전선을 누비며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했던 이원익, 병조판서로서 군무를 총괄한 이항복 등이 ‘강화’에 찬성했고, 임금을 따라 후방의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신하들은 ‘응징’을 외쳤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 왜군과의 강화 찬성에 탄핵받아

특히 강화 반대론자들은 강화 찬성론자를 매국노로 몰아붙였다. 화의를 체결해 만대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왜군으로부터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사람, 전장에서 왜병과 직접 싸웠던 사람, 또는 왜병으로부터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서 강화 반대를 목청껏 외쳤던 이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의리명분의 신념에 투철했던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도망쳤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일에만 매달렸던 사람들이었다. 위험한 일을 맡기 싫어 눈치만 보고, 나라와 백성의 현실은 도외시한 채 입으로만 명분론을 떠드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그간의 과오를 덮으려는 듯 너도나도 선명성 경쟁에 나선 것이다.


누가 진짜 매국노인가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는 바로 이 과정 속에서 나왔다. 에둘러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전쟁의 참화를 목도해 본 적 없는 자들이, 극단의 현실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한 적 없는 자들이, 이제 와서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신은 본래 담질(痰疾)을 지병으로 앓아왔사온데 어제부턴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에 통증이 심하여 비명조차 마음대로 지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녁나절 저에 대한 홍문관의 차사(箚辭)가 전해져왔기에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나 읽어보니 그 가운데에 ‘화의(和義)를 주장하는 사람과 이익을 탐하여 이를 뒤쫓는 무리들로 인해 청의(淸議)가 용납되지 못하고 윤리와 기강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척화의 의리를 더욱 견고히 함으로써 이런 사악한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이 차사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깜짝 놀라 망연자실하였나이다.’(이하 인용은 모두 백사 이항복의 시문집인 [白沙集]이 출처임)

이 때 이항복은 왜군과의 강화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이원익 등과 더불어 홍문관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항복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 일전에 전하의 명을 받아 남쪽 지방을 직접 확인해 본 결과 해안에 웅거한 적의 세력이 광대하여 언제고 다시 침범해 올 우려가 컸나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의 형세는 위태로워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재물은 모두 고갈되었고 백성은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병으로 다 죽게 된 사람이 목구멍 사이에 조그만 기만 남아 있을 뿐, 수족이 마비되고 장기도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같은 실정입니다. 그래서 신은 생각하기를, 고금 천하에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는 도리는 ‘전(戰)·수(守)·화(和)’ 이 세 가지에 불과할 것이니, 지금은 도저히 적과 싸울 수 없고 또 스스로 방어할 수도 없는 형편인 만큼, 오직 저들의 강화 요구를 들어주어 목전의 위기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여겼었습니다.”

외세로부터 나라가 침공을 당하게 되면 맞서 싸워 격퇴하거나, 굳게 지키며 방어하거나, 화평교섭을 하거나 이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당시 조선은 오랜 전쟁 탓에 매우 쇠잔해진 상황이었다. 국토는 황폐했고 수많은 백성이 죽었다. 국가 재정은 진작에 거덜이 났으며 병사로 충당할 백성이 없었다. 전쟁수행 능력이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더욱이 아직 대군의 왜병이 한반도 남단에 주둔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 있을까? 비록 분하더라도 강화를 체결해 어서 빨리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복수할 기회라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이항복은 말을 이어갔다. “신이 전장을 살피고 오랜만에 조정에 들어왔을 때, 마침 전하께서는 화(和)·전(戰)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회의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은 조정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저 솔직하게 제 생각을 진술했던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척화(斥和)의 기치를 크게 드높이며 기강을 세우려 하니 신은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만, 신의 생각을 변명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영의정과 좌의정 모두 와병 중에 있고 오직 신만이 정승으로 집무하고 있는 이 때 함부로 사퇴하는 것이 저어하여 전하의 결정을 기다렸사오나, 우물쭈물하여 구차하게 용서를 기다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이는 신에게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옵니다. 이에 사직하고자 하오니 부디 전하의 재가를 바라옵니다.”

왜군의 침입으로 조선이 흘린 피와 눈물, 고통의 무게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원수를 확실히 응징하지 못하고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조선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람의 생각은 달라야 하는 법이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나라의 생존과 백성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이를 위해 가장 타당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엄청난 비난과 공격이 예상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더 이상 전쟁수행 능력 없었던 조선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동안 다섯 번 넘게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전쟁수행에 헌신한 이항복에게 척화는 훨씬 더 쉬운 선택지였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척화를 주장할 자격을 가졌던 만큼 대의명분의 수호자로서 추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조정 여론의 압박 따위는 개의치 않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확고히 표현한다. 흔히 간신에게 충신이 핍박받고 비겁자들에게 용감한 사람들이 비난받는 것, 인간사가 남기고 있는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책임을 지고 희생양을 감수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항복처럼 말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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